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2차대전 중 나치 맞선 시민들… 12세 소년도 총들고 저항

입력 : 2019.08.09 03:00

[1944년 바르샤바 봉기]
폴란드 수도에서 유럽 최대규모 봉기… 나치가 도시 파괴하고 시민 학살

한국 반일 시위에 '독일은 사죄했는데 일본은 사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자주 등장하는 사진이 한 장 있어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바르샤바의 '게토 영웅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진입니다. 하지만 브란트 총리가 정확히 무엇에 대해 사죄했는지 자세한 사연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요?

올해 8월은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난 지 75주년이에요. 바르샤바 봉기는 역사상 가장 영웅적이고 비극적이고 악마적인 사건으로 꼽혀요.

유럽에서 2차대전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됐어요. 히틀러의 정책에 따라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은 게토에 갇혔어요. 게토는 특정 집단을 특정 공간에 몰아넣고 벽을 둘러 막은 격리 구역입니다. 바르샤바의 게토에는 40만명이 수용됐어요.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용자들이 죽어갔어요. 하지만 그것도 아직 최악은 아니었어요. 1942년 나치는 게토에 가둔 유대인들을 동유럽으로 이송하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실려간 곳은 지상 최악의 장소였지요.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영웅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영웅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나치 독일이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인을 학살한 것을 사죄한 겁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가족들로 꽉 찬 열차가 깊은 숲속 '역'에 섰어요. 플랫폼에서 악단이 유쾌한 노래를 연주하며 맞았죠. 하지만 잘 보면 이 역의 벽시계는 작동하지 않았어요. 진짜 시계가 아니라 손으로 그린 시계였으니까요. 역 주변을 전기 철조망이 에워싸고 있는 것도 이상했을 거예요. 안에서 밖을 볼 수 없게 위장물을 친 철조망이었죠.

나치는 남자, 여자, 어린이를 따로따로 줄세운 뒤 각각 별도 건물로 이끌었어요. 건물 안에 들어서자 옷을 벗고 샤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벌거벗은 무력한 사람들에게 야만의 시간이 닥쳐왔어요.

경비병이 경비견을 세우고 채찍을 후려갈기며 유대인들을 '샤워실'로 데려가 밖에서 문을 잠갔어요. 안에 갇힌 유대인들은 독가스에 숨졌어요. 나치가 굴착기로 시신을 화장터에 실어 날랐어요.

이곳이 바로 '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였어요. 폴란드인 주민들은 사람이 꽉 찬 열차가 숲속에 들어갔다가 빈 채로 나오는 걸 보고 몸을 떨었어요. 밤이면 숲속에서 거대한 불길이 피어나고, 끔찍한 악취가 몇 ㎞ 밖까지 번졌어요.

나치 중에서도 가장 광신적이고 잔혹했던 게 히틀러의 친위대 SS였어요. SS는 1943년 나치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트레블링카를 파괴했어요. 하지만 증거를 많이 남겼죠.

그사이 바르샤바의 게토에서는 아직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했어요. 이들은 무기와 폭탄을 밀반입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나치와 싸웠죠.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게토 내의 건물과 지하실, 하수도에서 싸움이 계속됐어요.

SS는 화염방사기로 게토를 불태워 유대인들을 지상으로 끌어냈어요. 나치에 맞서 싸우던 핵심 전사들은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했어요. 유대인들이 죽은 뒤, 나치는 게토 전체를 파괴했어요. 당시 사진을 보면 마치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의 히로시마를 방불케 해요.

하지만 바르샤바의 고통은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요. 1944년 여름, 소련군이 진격해왔어요. 그해 8월 1일, 나치에 맞서는 폴란드 게릴라들이 운명을 걸고 일어서기로 했어요. 바르샤바는 독일 점령군에게 맞서 봉기했어요.

그러자 나치는 가장 야만적인 SS 부대를 급파했어요. 이들은 폭격기에 대형 포와 탱크까지 몰고 가 폴란드 게릴라들이 숨은 건물과 바리케이드(시가전을 위해 쌓아놓은 방어벽)를 덮쳤어요. 학살이 이어졌어요. 요람에 든 아기를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어요. 폴란드인들은 영웅적으로 저항했어요. 가장 어린 폴란드 게릴라는 열두 살 소년이었어요. 여덟 살 소녀가 간호병으로 나섰고요.

폴란드 저항군은 1944년 10월 2일 최종 항복했어요. 독일은 바르샤바의 남은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도시 전체를 파괴했어요. 하지만 폴란드는 살아남았어요. 전후에 바르샤바 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 사진과 그림, 기억에 의지해 도시 전체를 재건했어요.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된 지 75주년이 된 지난 1일, 저의 폴란드인 친구가 그때 봉기에 참여했던 할아버지에게 "그때로 돌아가면 그 절망적인 싸움을 또 하겠느냐"고 여쭤봤대요.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 대답했어요. "그래."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유대인 봉기는 2차대전 중에 일어난 최대 규모 유대인 봉기예요. 1944년 바르샤바 시민들의 봉기는 유럽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저항운동이었고요. 오늘날 바르샤바에는 여러 추모비가 있어요. 가장 감동적인 건 '어린 빨치산' 동상이에요. 어린이가 무거운 얼굴로 자기 머리엔 너무 큰 철모를 쓴 채 기관총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지요. 1970년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무릎을 꿇은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앤드루 새먼 아시아타임스 동북아 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