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세상 떠난 지 30년… 여전히 클래식 음반 총판매량 1위

입력 : 2019.08.03 03:05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유명한 지휘자의 얼굴이나 이미지를 떠올릴 때 어떤 사람이 맨 처음 생각나시나요? 양손으로 지휘봉을 감싸쥐고 깊은 사색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집중하는 멋진 옆 얼굴, 바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 1989)의 사진을 떠올리실 분이 많을 것 같아요. 카라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가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인물 중 하나랍니다.

지난달 16일은 카라얀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어요. 카라얀은 35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어요. 카라얀 덕분에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레이블이 클래식을 모르는 대중에게도 친숙한 존재가 됐죠.

카라얀은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1908년 4월에 태어났어요. 그의 조상은 카라야니스라는 성을 가진 그리스계였다고 합니다. 카라얀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래서인지 어린 헤르베르트는 음악과 함께 이공 계통에도 재능이 뛰어났어요. 그가 음악을 하게 된 데는 형 볼프강의 존재가 컸다고 해요. 유난히 몸이 왜소했던 헤르베르트는 형 볼프강과 비교하며 신체적 콤플렉스를 느꼈고, 음악에서는 형을 이기고 말겠다며 피아노 연주에 전념했죠. 처음엔 피아니스트를 지망했지만 손가락에 건초염이 걸려 어려움을 겪었어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만난 스승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의 권유로 지휘자로 진로를 바꿉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있던 1976년 촬영한 프로필 사진. 오른손에 지휘봉을 쥐고 있어요. 카라얀은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무대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있던 1976년 촬영한 프로필 사진. 오른손에 지휘봉을 쥐고 있어요. 카라얀은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무대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29년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한 카라얀은 소규모 오페라 극장을 거쳐 1934~1938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일합니다. 그 후 베를린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으로 일하면서 베를린 필 지휘자로 데뷔했지요. 카라얀은 1938년 4월 베를린 필과 첫 만남을 가진 뒤,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함께 만들어나갈 이상적인 오케스트라를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졌어요.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는 지금도 전설로 통하고 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였습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이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그를 미워했어요. 카라얀의 인기를 질투하기도 했죠.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이 자신의 후임이 되는 걸 원치 않았지만, 카라얀은 자신의 인기와 인맥을 이용해 1955년부터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를 맡아요. 1956년 4월에는 정식으로 이 오케스트라의 종신 상임지휘자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카라얀은 1954년 사망한 푸르트벵글러와는 마지막까지 껄끄러운 사이였지만, 음악적으로는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아울러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20세기 중반까지 최고의 명성을 누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법도 좋아해서, 두 사람의 장점을 한데 섞어 자신의 해석에 반영시키려 했지요. 날카로우면서도 작품의 핵심을 명확히 표현해 누구나 알기 쉽게 이해시키는 카라얀의 지휘 솜씨는 이런 끈질긴 노력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20세기 후반 클래식 팬들이 음반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 예측했어요. 카라얀은 1950년대 초반 EMI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와 함께 뛰어난 음반을 선보였어요. 이후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과 함께 베를린 필 음반을 잇달아 녹음합니다. 정확한 공식 집계는 아니지만 카라얀은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약 900여 종의 음반을 녹음했고 약 2억장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알려졌어요. 클래식 음악가 중 판매량 1위로, 카라얀에 비견할 만한 사람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는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한 음향과 영상 장비 등에도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었어요. 음반과 함께 동영상도 많이 제작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카라얀이 연출도 겸한 것들이었죠. 카라얀의 영상물들은 작은 키를 가리고 지휘 포즈가 멋지게 잡히는 각도에만 집중해 어색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음악과 제법 잘 어울리는 연주 영상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카라얀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음악 후배를 발굴하는 데도 열심이었습니다. 아네조피 무터(바이올린), 예브게니 키신(피아노) 등은 카라얀과 연주한 뒤 세계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성악가들도 그의 손을 거쳐 스타가 된 인물이 많습니다. 테너 니콜라이 게다, 호세 카레라스, 프란체스코 아라이자,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소프라노 조수미, 캐슬린 배틀 등이 대표적이죠. 카라얀은 특히 맑고 깨끗한 미성을 좋아했는데, 이는 어릴 적 성대를 다쳐서 평생 쉰 목소리를 갖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해요.

카라얀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화제의 중심이 되고 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거인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20세기를 움직인 인물이죠. 그가 남긴 음악은 21세기에도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어요.

[명지휘자 카라얀과 첼리비다케… 상임지휘자 자리 두고 경쟁했죠]

카라얀이 우여곡절 끝에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가 되기까지, 유력한 후보로 경쟁한 지휘자가 있었어요. 루마니아 출신의 세르주 첼리비다케(1912~1996)입니다.

첼리비다케는 철학과 수학을 전공한 후 파리로 건너가 지휘를 공부한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어요. 2차 대전 직후 베를린 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려 지휘 활동이 금지된 시기가 있어요. 이때 푸르트벵글러 대신 베를린 필의 임시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사람이 첼리비다케입니다.

그는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베를린 필 단원들과는 불화를 겪었어요. 불같은 성격과 지나친 완벽주의로 단원들 마음을 잃은 거예요. 카라얀과의 대결에서 밀린 것도 그래서였죠. 이후 그는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을 거쳐 1979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맡았습니다.

카라얀과 달리 첼리비다케는 녹음된 음악을 불신해 음반 제작을 꺼렸습니다. 그의 음악은 그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실황 녹음·영상을 통해서 감상할 수 있어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