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동귀의 심리학이야기] 100원을 빌리려면… 10원부터 빌려달라 하세요

입력 : 2019.08.02 03:09

부탁의 기술

어느 추운 날 한 아라비아인이 천막을 치고 야영하고 있었어요. 옆에 있던 낙타가 말을 건넵니다. "종일 걸었더니 발이 피곤해요. 발만 천막 안에서 쉬게 해 주실래요?" 고단한 낙타를 애처롭게 생각한 아라비아인은 승낙합니다. 잠시 뒤 낙타는 "날씨가 추워서 그런데 머리도 좀 넣을 수 있을까요?" 하고 부탁합니다. 아라비아인은 이번에도 부탁을 들어줍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낙타는 어느새 천막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타는 천연덕스럽게 아라비아인에게 요청합니다. "천막 안이 좁으니 좀 비켜줄래요?" 결국 아라비아인은 천막 밖으로 내몰려 밤새 추위에 떨었다고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죠. 여기서 낙타가 사용한 기법을 '문간에 발 들여놓기(The foot-in-the door)'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부탁을 들어주면 점차 큰 부탁도 들어주게 된다는 이야기지요. 왜 그럴까요?

◇작은 부탁을 들어주면 큰 부탁도 들어줘


1966년 미국 심리학자 조너선 프리드먼(Freedman)과 스콧 프레이저(Fraser) 연구팀은 캘리포니아 주부 156명을 대상으로 실험합니다.

A그룹은 '문간에 발 들여놓기를 실시한 집단'입니다. 실험에 참여한 주부에게 전화를 걸어 8가지 문항의 간단한 설문 조사를 부탁했어요. 설문 조사가 '문간에 들여놓은 발'이었습니다. B그룹엔 그런 설문 조사를 부탁하지 않았고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박다솜

연구팀은 사흘 뒤 두 그룹 주부에게 전화를 걸어 '2시간 동안 집을 방문해 찬장과 창고에 있는 제품을 살펴봐도 되겠느냐'고 물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남이 집에 2시간이나 들어와 있겠다는 새로운 부탁이었는데, A그룹(52.8%)은 B그룹(22.2%)보다 두 배 넘는 수락률을 보였어요. '문간에 발 들여놓기'가 효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작은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더 큰 부탁도 들어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흔쾌히 수락할 만한 간단한 부탁을 하면 이후에도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지는 거예요.

문간에 발 들여놓기 현상이 생기는 이유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가급적 일관성 있게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부탁을 들어주면 그 사람과 유대감을 느끼게 되고, 계속 상대방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자신이 조그마한 부탁을 먼저 들어준 것에 '내가 원래 돕고 싶었던 거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이미 도와주고 난 다음인데 그제 와서 '억지로 도와준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본인 기분만 더 불편해질 테니까요. '인지 부조화'를 막기 위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사람은 정서와 행동 사이에 불일치가 생기면 어느 한 쪽 방향으로든 일관성을 추구하려 하거든요.

사기꾼들은 이를 악용하기도 합니다. 처음에 적은 돈을 빌려 달라고 한 뒤 갈수록 액수를 늘려 결국은 큰돈을 빌려 가는 식이죠. 이들은 신용을 얻기 위해 처음 빌린 적은 돈은 꼬박꼬박 이자를 갚기도 한답니다. 그러다 큰돈을 빌린 뒤 잠적해버리고 말죠. 역으로 말하면 100원을 빌리려면 대뜸 "100원 빌려주세요"할 게 아니라 "10원만 빌려주세요"로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범죄 막는 데도 응용 가능

2016년 프랑스 심리학자 니콜라스 게겐(Guéguen) 연구팀은 이 기법이 범죄를 막는 데도 효과적임을 증명했어요. 이들은 프랑스 한 서부 도시 술집 근처에서 남녀 76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실험을 해봤습니다.

실험에 참여한 남녀는 술집 밖 의자에 혼자 앉아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그리고 이들 옆 테이블에 한 여행객이 와서 앉습니다. A그룹 참가자에게 이 사람은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 물어봅니다. 그리고 가방을 테이블에 둔 채 술집 안으로 들어가지요. B그룹 참가자에게는 여행객이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옆자리에 잠시 앉아 있다가 똑같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두고 술집으로 들어갑니다. 여행객은 A그룹에만 지금 몇 시인지 물어보면서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을 쓴 겁니다. 20초 뒤 도둑이 등장합니다. 진짜 도둑은 아니고, 도둑 역할을 맡은 두 번째 실험 조교죠. 도둑은 10초가량 술집 안팎을 살피다가 은근슬쩍 여행객이 두고 간 가방을 들고 가려 합니다. 이때 A그룹과 B그룹 반응은 어떻게 달랐을까요?

A그룹 참여자들이 남녀 모두 B그룹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이 도둑을 막아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그룹은 84%가 도둑을 제지한 데 비해 B그룹은 47%만 그렇게 했어요.

'문간에 발 들여놓기 기법'이 범죄 예방에서도 효력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물어보는 조그만 대화를 먼저 한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도 도둑을 막아서는 행동을 더 많이 하도록 했으니까요.


이동귀·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