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저승 여행길 새겨진 유골함… '죽음은 새로운 여정의 시작'

입력 : 2019.07.27 03:05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展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떠나고픈 여름 휴가철입니다. '여행'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나요? 산, 바다, 기차, 비행기, 열대 과일 그리고 도시 곳곳에 있는 미술관들도 생각나겠지요. 어떤 사람은 여행은 곧 자유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여행을 모험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면, 길을 잃은 도로시와 겁쟁이 사자, 뇌 없는 허수아비,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이 소원을 빌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갑니다. 낯선 곳에서 험난한 모험을 하면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바뀌지요. 집으로 돌아올 무렵엔 용감해지고 지혜로워지고 따스한 마음을 지닌 모습으로 모두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렇듯 여행은 단순한 구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현실을 떠나 자유로운 경험을 하면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다른 세상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번성했던 고대 에트루리아 사람들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내 처음으로 에트루리아의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전시는 10월 27일까지 계속될 예정입니다.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라는 전시 제목처럼 에트루리아는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줬지만,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지금은 로마의 그림자에 가려진 문명이지요.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와 주변 지역을 터전으로 성장했어요. 지중해의 포근한 날씨에 올리브가 풍성히 열리는 풍요로운 환경이었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탈리아 타르퀴니아에는 에트루리아 귀족들의 무덤이 6000개가 넘게 남아 있어요. 로마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90㎞ 거리에 있는 과거 에트루리아의 유력 도시입니다.

이탈리아 타르퀴니아에 있는 에트루리아 공동묘지에 그려진 ‘표범 무덤방의 벽화’.
사진1 - 이탈리아 타르퀴니아에 있는 에트루리아 공동묘지에 그려진 ‘표범 무덤방의 벽화’. /국립중앙박물관
사진1은 산 사람이 죽은 이의 영혼을 초대해 함께 모여 식사하며 춤을 추는 연회 그림이 그려진 무덤 모습입니다. 어떤 무덤에는 죽은 이를 위해 실제로 음식을 차리고 포도주를 잔에 채워 무덤 안에 함께 넣어둔 흔적이 남아 있곤 해요. 당대 역사가들은 '에트루리아인은 삶은 물론 죽음까지도 모두 여행이라 여기며 살았다'고 기록을 남겼어요.
사진2(사진 왼쪽) - 에트루리아의 저승사자 ‘반트’의 조각상. 기원전 4세기 말. 사진3(사진 오른쪽) - ‘여행하는 부부가 묘사된 유골함’. 기원전 2세기 말.
사진2(사진 왼쪽) - 에트루리아의 저승사자 ‘반트’의 조각상. 기원전 4세기 말. 사진3(사진 오른쪽) - ‘여행하는 부부가 묘사된 유골함’. 기원전 2세기 말. /국립중앙박물관
사진2를 보세요. 죽은 이들의 여행을 안내하는 저승사자인데, 이름은 '반트'입니다. 지금은 많이 부서지고 닳았지만, 반트는 일반적으로 날개가 달린 젊은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한 손에는 열쇠를 쥐고 다른 손에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고 전해져요. 열쇠로는 죽은 이들을 위해 저승의 문을 열어주고, 횃불로는 그들이 지하 세계로 내려갈 때 어두운 앞길을 밝혀주었다지요.

사진3은 저승으로 여행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돌로 된 유골함입니다. 상자의 몸체를 보면, 부부가 마차를 타고 이제 막 저승으로 향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어요. 마차 앞에서는 말을 탄 사람들이 부부에게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고, 마차 뒤에는 어른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배웅하듯 서 있어요. 유골 상자의 뚜껑에는 주름진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를 땋아 장식한 여자가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아 있습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다른 손에는 석류를 들고 있는데, 석류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지하 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를 떠오르게 하는 과일이에요.
사진4 - ‘페르세포네의 납치가 묘사된 유골함’의 한 부분. 기원전 2세기.
사진4 - ‘페르세포네의 납치가 묘사된 유골함’의 한 부분. 기원전 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아예 페르세포네 이야기를 담은 유골함도 있어요. 사진4는 지하 세계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아내로 삼기 위해 납치해가는 장면입니다. 화면 왼쪽에 여인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태우고 가는 남자가 보이네요. 그가 바로 하데스예요. 최고신 제우스가 페르세포네를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지하 세계의 음식을 하나라도 먹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답니다.
사진5 - 에트루리아 방식으로 흙을 구워 만든 ‘유피테르’(그리스명 제우스).
사진5 - 에트루리아 방식으로 흙을 구워 만든 ‘유피테르’(그리스명 제우스). /국립중앙박물관

안타깝게도 페르세포네는 지하에서 석류 하나를 먹은 상태였지요. 석류 때문에 결국 그녀는 일 년 중 반은 지하에 갇혀 있고, 나머지 반만 지상에서 사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해마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올라올 때면 땅의 여신인 어머니 데메테르는 세상의 모든 꽃을 활짝 피워 그녀를 맞이해요. 모든 생명이 새로 태어나는 봄이 되는 거죠. 에트루리아의 조각가가 유골 상자의 여인에게 석류를 쥐여 준 건 죽음이라는 긴 겨울 여행 후에 새봄을 맞으라는 뜻 아닐까요?

사진5는 로마인들의 신전에 붙어 있던 유피테르(그리스명 제우스)인데, 로마식 대리석 조각이 아니라 에트루리아 방식대로 흙으로 빚고 구워서 만들었어요. 로마 문화 속에 스며든 에트루리아 문화를 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에트루리아 1000년의 문화와 예술을 마음껏 살펴볼 수 있는 전시랍니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작가, 에트루리아 유적지 답사 후 기행기 남겨]

"에트루리아인들은 모든 것을 나무로 만들었고 그래서 도시도 꽃처럼 완전하게 사라져버렸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잘 알려진 영국 소설가 D H 로런스(1885~ 1930)가 1927년 에트루리아 유적지를 답사하고 남긴 글입니다. 그는 여행이 남긴 진한 여운을 담아 1932년 '에트루리아 유적 기행기'를 펴냈어요.

이 책에서 로런스는 에트루리아인은 자유롭고 즐거운 본성을 가졌을 거라고 썼어요. 편안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에트루리아 문화의 특징이라는 거죠. 이번 전시는 로런스의 발길을 따라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곳곳에 그가 기행기에 남긴 글귀가 붙어 있어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