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학자·스님부터 세종의 자녀들까지 총출동해 한글 연구

입력 : 2019.07.16 03:09

훈민정음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

세종대왕(재위 1418~1450)이 한글을 창제한 과정을 다룬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어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그린다고 해서 관심을 모으고 있죠.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최신 연구 중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처음엔 '표준 한자음 발음기호'?

세종대왕은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요?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요? 네, 맞습니다. '한글의 탄생'을 쓴 일본 학자 노마 히데키 메이지가쿠인대 객원교수는 "붓을 사용할 때 생기는 획의 삐침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선과 네모, 동그라미로만 이뤄진 한글의 원래 형태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간결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모던한 디자인은 필기도구 살 형편이 못 되는 가난한 백성들조차 나뭇가지 같은 도구로도 죽죽 그을 수 있는 모양이었어요.

그런데 '백성들을 위한 건 맞지만, 처음부터 새로운 문자를 만들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어요. '한글의 발명'을 쓴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글을 만들기 약 200년 전 중국에 원(元)나라가 생긴 뒤 중국어 발음이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큰 원인"이라 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한자 발음이 크게 달라지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 한자음을 교정한 새로운 '표준 한자음'을 만들어야 했죠. 그래서 편찬하기 시작한 책이 '동국정운'이었어요.

새로 정한 한자음 읽는 법을 알리려면 발음기호가 필요했겠죠. 발음기호 28자를 만들고 '백성에게 가르쳐야 하는 올바른 발음'이란 의미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는 겁니다. '문자'나 '글자'가 아닌 '음(音)'인 이유가 설명됩니다.

"이것으로 우리말도 쓸 수 있겠구나!"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은 말 순서가 달라 한문을 그대로 읽으면 의미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중간중간 '~은' '~이' '~이라' 같은 토를 달아서 읽어야 했는데, 다른 글자가 없다 보니 한자의 음을 바꿔서 토를 다는 '변음토착(變音吐着)'이란 방법을 썼지요. 한문에 정통한 많은 지식인에게 이것은 아주 이상하고 괴로운 표기였다고 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안병현

정광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였다고 봅니다. "훈민정음으로 토를 달면 해결되지 않겠사옵니까?" 훈민정음을 써서 토를 달아보니 한문 본문과 토의 구분이 확실해졌어요. 정의공주는 이때 부왕으로부터 노비 수백 명을 상으로 받았다고 해요. 더 나아가, 세종대왕은 여기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요. "이것으로 우리 고유어를 표기할 수 있겠구나!" 스스로 얼마나 위대한 문자를 만들어냈는지 '사후 각성'을 한 겁니다.

"불교 학승들이 창제에 큰 역할"

이때부터 세종대왕은 자녀인 세자(훗날 문종), 수양대군(훗날 세조), 안평대군, 정의공주와 함께 새 문자의 우리말 표기 작업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중 수양대군은 신미 스님, 집현전 학사 김수온 등과 함께 '증수석가보'라는 불경을 한글로 풀어 새 문자를 시험하게 했어요. 세종도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한글로 우리 말을 적을 수 있는지 몸소 시험했지요. 정광 교수의 주장이 옳다면, 한글 창제는 당초 발음기호로 시작된 문자가 우리 말을 담는 과학적인 표음문자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도 컸지만, 한글 창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은 뜻밖에도 불교 학승(學僧)들이었다고 정광 교수는 말합니다. 고대 인도에서 발달했던 음성학이 팔만대장경 속에 포함됐고, 이를 배운 학승들이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고 해요.

[옛 몽골문자 모방? 일부만 영향]

외국 학계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한글은 옛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고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일부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한글은 결코 파스파 문자의 단순한 모방이라고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문자랍니다.

우선 한글의 자형(글자 모양)은 어떤 문자와도 달라요. 발음기관과 천(天)·지(地)·인(人)을 표현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자형이죠. 소리가 나지 않는 'ㅇ' 자를 써서 모든 모음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 종성(받침)이 있는 것도 파스파 문자에 없는 한글만의 특징입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