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884년 시작된 근대 우편제도, 서울~인천서 처음 시행됐죠
우편제도 도입
◇1884년 '우정총국'을 세우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487년 신라 소지마립간이 '비로소 사방에 우역(郵驛)을 두고 맡은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와요. 고대국가도 통신망을 갖추고 있었다는 걸 짐작하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우편제도가 있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의 우편제도는 오로지 공무용이었어요. 일반 백성은 이용할 수 없었지요. 사대부들은 하인을 시켜서 편지를 전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어요.
개화파 홍영식(1856~1884)은 1881년 일본, 1883년 미국을 잇달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특히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이런 근대 우편제도에 큰 관심을 보였죠. 미국에 갔을 때도 미국 우정성과 뉴욕 우체국을 살펴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죠.
홍영식은 조선에 돌아와서 고종 임금에게 근대화된 우편 사업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누구나 일정 요금만 내면 지역이나 거리에 관계없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대적인 우편제도를 도입하자는 얘기였어요.
고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립하라"고 명했어요. 당시 병조참판이던 홍영식이 우정총국 우두머리인 총판에 임명돼 우편제도 도입을 총괄했어요.
◇근대적인 우편 업무를 시작하다
홍영식의 지휘 아래 우리 정부는 미국·영국 공사관에 우정총국을 설치한다고 알리고, 일본 및 홍콩 우정청과 우편물교환조약도 맺었어요. 홍콩 우체국 부국장을 지낸 허치슨, 일본인 우편 실무자 오비, 미야자키 등 외국인 전문가도 고용했고요.
- ▲ 그림=안병현
조선은 우표 인쇄 기술이 부족한 처지라 일본에 우표 5종을 인쇄해달라고 맡깁니다.
드디어 1884년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우정총국은 인천에 세워진 인천분국과 함께 근대적 우편 업무를 시작했어요. 근대적 우편 업무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조선 조정은 이보다 앞서 1882년에도 우정사라는 관청을 세워 근대적인 교통·체신 업무를 맡겼지만, 실제로 근대 우편제도 도입에 성공하지는 못했거든요.
◇우정총국 문 열자마자 벌어진 정변
근대적 우편 업무는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시작됐어요. 서울 시내에서는 체전부(遞傳夫·오늘날의 집배원)가 매일 오전·오후 한 차례씩 편지를 걷어 배달했어요.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우편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서울 체전부와 인천 체전부가 각각 우편물을 짊어지고 걸어서 출발해 중간 지점에서 만나 우편 행랑을 맞바꿔 돌아갔어요.
하지만 우정총국의 우편 사업은 불과 18일 만에 중단됩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틈타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개화당이 기존 정부를 뒤엎는 갑신정변을 일으켰거든요. 우정총국 총판이던 홍영식도 가담했죠. 그렇지만 갑신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났어요. 홍영식도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요. 우정총국은 폐지됐어요.
그 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서울과 각 지방에 지금의 우체국과 같은 '우체사'가 설립됐어요. 그때 비로소 근대적인 우편 업무가 다시 시작됩니다.
☞최초의 근대 우표
우리나라 첫 근대 우표는 우정총국이 세워진 1884년 11월부터 쓰인 ‘문위우표’〈사진〉입니다. 당시 화폐 단위가 ‘문(文)’이라 ‘5문’ ‘10문’ 이라고 쓰여있어 수집가들이 ‘문위우표’라고 부릅니다. ‘대조선국 우초’라고 인쇄돼 있어 우표(郵票) 대신 ‘우초(郵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죠. ‘한국우정 100년사’에 따르면 “국권의 자주독립을 견지하여 적절한 용어를 창안했다”고 합니다. 일본 번역을 그냥 쓰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