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남녀주인공 파멸시키는… 그의 목소리는 '바리톤'

입력 : 2019.07.06 03:03

오페라 속 악역

최근 여러 매체에 등장해 친해진 단어가 하나 있죠. 바로 '빌런(villain)입니다. 원래 뜻은 '악당'으로 연극이나 소설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역할입니다. 매력적인 악역은 주인공보다 더 조명받기도 하죠.

유명한 오페라에도 악역이 자주 등장합니다. 남녀 주인공은 테너와 소프라노가 맡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관계를 훼방하거나 파멸시키는 악역이 남자일 경우 그 목소리는 대부분 바리톤입니다. 남자 목소리 중 테너와 베이스 사이에 들어 있는 중간 음역인 바리톤은 깊고 중후한 소리와 극적이고 힘있는 소리를 모두 낼 수 있어요. 다양한 음색으로 여러 가지 표현을 하기에 쉬워 뛰어난 연기력이 필요한 악역에 잘 어울리죠.

오페라의 '악역' 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역시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오텔로'(1887) 에 등장하는 이아고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오셀로가 원작이에요. '오텔로'는 주인공인 오텔로(테너), 그의 아내인 데스데모나(소프라노)와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이아고가 극을 이끕니다.

바리톤 안톤 자라예프(왼쪽)가 오페라 ‘오텔로’에서 악역 이아고를 맡아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바리톤은 테너와 베이스 사이에 있는 중간 음역대를 맡아요. 깊고 중후한 소리와 극적이고 힘있는 소리를 모두 내며 폭넓은 연기로 극을 이끌어갑니다.
바리톤 안톤 자라예프(왼쪽)가 오페라 ‘오텔로’에서 악역 이아고를 맡아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바리톤은 테너와 베이스 사이에 있는 중간 음역대를 맡아요. 깊고 중후한 소리와 극적이고 힘있는 소리를 모두 내며 폭넓은 연기로 극을 이끌어갑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베네치아공화국의 장군인 오텔로가 카시오를 부관으로 임명하자 이아고는 자신이 부관이 되지 못한 데 앙심을 품어요. 복수를 다짐한 이아고는 오텔로와 카시오를 이간질하고, 나아가 오텔로로 하여금 카시오가 데스데모나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의심하게 유도합니다.

오텔로는 결국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이고 말아요. 데스데모나의 하녀이자 이아고의 아내인 에밀리야가 사실을 폭로해 모든 오해가 풀립니다. 뒤늦게 어리석은 실수를 깨달은 오텔로는 스스로 자신의 칼로 가슴을 찔러 숨을 거둡니다.

깊고 어두우면서 음흉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아고의 목소리는 극 전체를 좌우하는 요소입니다. 2막에서 부르는 이아고의 아리아 '나는 잔인한 신을 믿는다'는 그 하이라이트죠. 나는 악인이며, 나를 만들어낸 신을 믿는다며 냉소하는 내용입니다.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토스카'(1900)에 나오는 바리톤 역인 스카르피아도 대표적인 오페라 속 빌런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18세기 말 이탈리아. 로마의 경찰서장인 그는 여주인공인 아름다운 가수 토스카(소프라노)를 차지하려는 검은 마음을 품고 있죠. 토스카는 화가인 카바라도시(테너)와 사랑을 키우고 있었거든요.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가 범죄자를 도와준 혐의가 있다며 그를 체포해 고문합니다. 그러면서 토스카에게 강압적으로 구애하지요. 압박에 못이긴 토스카는 스카르피아의 요구에 응하지만, 품에 숨겨 놓았던 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스카르피아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토스카와 카바라도시는 로마에서 탈출하려 하지만 스카르피아가 죽기 전에 꾸며 놓은 간계에 걸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죠.

주인공이 모두 사망하는 강렬한 비극인 '토스카'에서 악을 상징하는 스카르피아의 존재감은 사랑하는 두 연인 이상으로 큽니다. 특히 2막에서 카바라도시를 고문하며 집요하게 토스카를 괴롭히는 대목은 바리톤이 맡은 악역 가운데 연기력과 노래 실력 모두를 과시할 수 있는 최고의 장면이죠.

처음에는 악역으로 시작해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점차 불쌍한 역할로 변화하는 작품도 있어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1851)입니다. 만토바 공작(테너)의 어릿광대인 리골레토(바리톤)는 공작의 총애를 받으며 공작이 농락하는 여성들과 그 가족을 놀려먹습니다. 당연히 공작의 피해자들은 리골레토에게 저주를 퍼붓고요.

리골레토는 사실 숨겨 놓은 딸 질다(소프라노)를 걱정하는 인물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고용주인 공작의 유혹으로부터 질다를 보호하려 하는데, 어느새 공작의 마수가 질다를 덮치죠. 이에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를 통해 공작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질다가 대신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납니다. 딸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리골레토는 결국 잘못 놀린 세 치 혀 때문에 무서운 저주를 받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이 오페라에서 리골레토는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주연을 맡은 바리톤은 유머러스함과 분노,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을 자유자재로 나타내야 하죠. 살인청부업자인 스파라푸칠레(베이스)와 만난 후 부르는 아리아 '우리는 닮았다'에서 칼보다 더 무서운 자신의 언행을 조소하며, 질다가 공작의 거처에 잡혀온 후 나타나 노래하는 '천벌을 받을 자들아'에서는 사랑하는 딸을 돌려달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호소가 담겨 있습니다.

남녀 주연 사이에서 절묘한 갈등과 반전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바리톤들의 모습이 정말 멋지죠? 멋진 악역들도 선한 주인공들만큼의 박수갈채를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남자 배역 모두가 악역?]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게티이미지코리아

등장하는 남자 배역 중 선한 존재가 없는 작품도 있어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1787)입니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의 얘기를 바탕으로 했죠. 천벌도 두려워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돈 조반니(바리톤)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시종인 레포렐로(베이스)도 주인의 나쁜 짓을 도와주는 인물로 나옵니다. 여주인공 돈나 안나의 약혼자 돈 오타비오(테너)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제대로 복수조차 하지 못하죠. 돈 조반니는 오페라 첫 장면에서 돈나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을 죽였는데, 결국 기사장의 영혼이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유혹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들의 속고 속이는 모습에서 날카로운 풍자가 느껴지는 작품이에요.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