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도성 밖 '한양생활권'… 수도 방어하고 농산물 공급했죠

입력 : 2019.07.02 03:09

조선시대 성저십리(城底十里)

서울의 '4대문' 중에서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과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돈의문)은 잘 알려진 지명이에요. 그럼 '북대문'은 어디일까요?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 여기 해당됩니다. 하지만 다른 대문들과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 조선시대에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곳이라고 해서 주로 닫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년 초가 되면 도성의 부녀자들이 숙정문으로 모여들어 문기둥에 여러 신상(神像)을 걸어 놓고 복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인왕산 칠성암도 신당으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요.

'한양의 확장판' 성저십리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엄격한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한양 도성 안에서 무속 관련 건물을 짓는 것도, 굿을 하거나 점을 치는 것도 모두 금지했어요. 그런데 숙정문과 인왕산에서 있었던 일은 분명 무속 행사였어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정답은 이 지역이 '사실상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곳', 그러니까 한양 도성 외곽이었다는 데 있어요. 숙정문 북쪽과 인왕산 칠성암 모두 도성에서 살짝 벗어난 지점이었거든요. 이처럼 조선시대 '서울 생활권'이면서도 도성 바깥이었던 지역이 바로 '성저십리(城底十里)'예요. 한양 도성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를 뜻하죠.

성저십리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에서 강북 지역 대부분이 포함됩니다.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이 성저십리를 포함해 서울의 역사를 폭넓게 바라본 책 '조선시대 다스림으로 본 성저십리'를 펴냈어요.

수도 인구 분산, 제사와 외교의 공간

성저십리는 조선시대 내내 한양 도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유입되는 인구의 거주지, 물류 창고 소재지, 교통·통신의 출발과 종착지, 각종 재화의 집결지였지요. 도성에 비해 하층민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이곳에 천재지변이나 사회 격변에 대비한 안전망을 마련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어요.
성저십리 그래픽
/그림=안병현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사 관련 기관도 이곳에 여럿 있었어요. 특히 삼각산, 한강단, 목멱산(지금의 남산)에서 중요한 제사가 이뤄졌어요. 대외관계와 관련한 중요한 장소도 이곳에 있었는데요, 바로 서대문 바깥에 있던 영은문과 모화관이에요. 가장 중요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 사신을 맞는 곳이었지요.

군사적 측면에서 성저십리는 한양을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기도 했어요. 북쪽에는 북한산, 남쪽으론 한강이 있어 천혜의 군사 경계가 됐고, 용산 지역에는 군량을 보관했던 군수창고가 있어 수도방어·군수지원 체계가 집중돼 있었어요. 도로망은 물론, 정보 전달 기능을 담당한 역·원·봉수 등이 성저십리 내에 거미줄처럼 포진해 있었죠.

무속의 숨이 트였던 농업 중심지

엄격한 유교 질서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백성에게 친숙한 무속문화가 조금이나마 숨이 트인 곳도 성저십리였어요. 서쪽으로는 아현과 용산·새남터, 동쪽으로는 광희문 주변과 왕십리·금호동 일대에 무속인들이 모여 살았죠. 나라에서도 종종 무속과 결부된 기우제나 산천제를 지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런 '국행제'가 열린 장소도 성저십리였고요.

경제적 측면에서, 도성을 둘러싼 성저십리는 도성에 농산물을 공급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한양 3대 시장 중 하나였던 서소문 밖 칠패장, 동대문 밖 적전(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던 밭), 서대문 밖 채소밭 등이 모두 성저십리에 있었어요.

[지금의 강남구, 60년 전엔 서울 아닌 경기도 소속이었죠]

조선시대 한양 도성은 대체로 지금의 서울시 중 종로구·중구 일부만 해당되는 지역이었어요. 1895년 성저십리 일부가 한성부에 편입됐다가 1914년 총독부에 의해 경성부 면적이 축소됐고, 1936년 다시 마포·영등포와 동대문구 등으로 넓어졌죠.

광복 이후인 1949년엔 지금의 광진구와 은평구가 서울에 포함됐고, 1963년엔 강남·강동·강서 일대, 1973년 구파발 등이 모두 서울특별시가 돼 대체로 지금의 경계를 이루게 됐습니다. 2015년엔 위례신도시의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됐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