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돛단배로 시작해 뱃길·기찻길 장악… 美 역사상 자산 2위

입력 : 2019.06.26 03:09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지난 17일 패션 디자이너·작가·화가 등으로 활동했던 글로리아 밴더빌트(95)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미국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Vanderbilt·1794~1877·작은 사진)의 고손녀(4대손)입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석유왕' 존 D 록펠러와 어깨를 견주는 미국 최대 부호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14년 CNN머니는 '사망할 때 남긴 자산이 당시 미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들을 정했습니다. 록펠러(GDP의 1.5%)가 1위, 밴더빌트(1.2%)가 2위, 카네기(0.6%)는 6위를 차지했습니다. 밴더빌트는 자산 1억달러를 남겼는데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 약 2050억달러(약 237조원)에 달합니다. 록펠러는 지금 돈으로 2530억달러, 카네기는 1010억달러를 남겼죠.

'제독'이라 불린 선박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열여섯 살이던 1810년 빌린 100달러로 돛단배를 사들여 뉴욕 스태튼섬과 맨해튼을 오가는 여객선을 운영합니다. 남들보다 싼 요금을 받고 정시 운행을 강조하자 사업은 번창했어요. 1817년에는 증기선 선장이 돼 배를 몰면서 신기술인 증기선 운송법을 익힙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밴더빌트는 증기선 운송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미국 동부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을 확장하면서 1840년대에는 100척에 달하는 증기선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함대 사령관을 뜻하는'제독(commodor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죠. 명실상부한 '선박왕'이 된 겁니다.

나이 일흔에 철도에 '올인'

'선박왕' 밴더빌트는 일흔 가까이 돼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죠. 남북전쟁 중에 철도의 가능성을 본 그는 선박업을 정리하고 철도 운송업에 진출합니다. 일흔이 된 1864년에는 아예 배를 한 척도 남김없이 팔아치우고 철도에 '올인'합니다. 당시 미국은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동부에 수많은 섬유공장이 들어섰지요. 증기선만으로는 물건을 옮기는 데 한계가 왔습니다. 배에서 철도로 물류의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순간이었죠.

밴더빌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선박업으로 벌어들인 자본을 활용해 여러 개의 단거리 철도 노선을 사들여 그것을 하나로 연결했습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19세기 미국 철도망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아들 빌리 밴더빌트(맨 왼쪽) 등 미국 기업가들이 철도망을 나눠 가지는 모습을 풍자했습니다.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19세기 미국 철도망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습니다. 이 그림은 그의 아들 빌리 밴더빌트(맨 왼쪽) 등 미국 기업가들이 철도망을 나눠 가지는 모습을 풍자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그가 철도왕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전략적 포인트인 '뉴욕항'을 오가는 철로를 철저하게 확보한 데서 왔습니다. 당시는 미국 동부로 들어오는 물건도, 미국 동부에서 나가는 물건도 뉴욕항을 거쳐야 했던 시절이었거든요. 밴더빌트는 뉴욕항과 미국 대륙을 연결하는 허드슨강 철교 노선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경쟁 기업 열차는 이 철교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경쟁 철도업체 주가를 떨어뜨렸고, 주가가 떨어진 경쟁 업체를 인수·합병하면서 철도 운송업을 장악했죠. 나중에 '석유왕'이 되는 록펠러도 초창기에는 밴더빌트의 고객이었습니다. 록펠러는 당시 대표적인 석유 생산지 클리블랜드에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의 석유를 밴더빌트가 실어날랐죠.

밴더빌트는 결국 미국 동부 알짜 철도 대부분을 장악합니다. 뉴욕에서 시카고, 피츠버그, 클리블랜드로 가는 노선 등이죠. 미국 철도 노선의 40%가 밴더빌트 소유였다고 합니다. 밴더빌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빌리 밴더빌트에게 사업을 넘깁니다. 그는 아들에게 "어떤 바보든 떼돈을 벌 수 있다. 그러나 머리 없이는 그 재산을 지킬 수 없다"고 했죠. 빌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2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밴더빌트 가문의 부(富)는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졸부 딱지 떼려 흥청망청… 밴더빌트家, 3대부터 내리막]

2대째까지 엄청난 부를 모았지만 밴더빌트 가문은 더는 부자로 꼽히지 않습니다. 자동차와 송유관이 등장하면서 철도운송업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막대한 재산을 흥청망청 썼기 때문입니다. ‘졸부’ 딱지를 떼고 뉴욕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하룻밤 파티에 지금 돈으로 600만달러(약 72억원)를 쓰기도 했답니다. 뉴욕 맨해튼 5번가에 거대한 맨션을 여러 채 짓기도 했죠. 밴더빌트의 유산은 테네시주 내슈빌의 밴더빌트대학으로 남았습니다. 코닐리어스가 100만달러를 기부해 1873년 세워졌는데 아이비리그 대학 버금가는 명문입니다.


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