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디자인·건축이야기] 거리에도 웹사이트에도… 어디에서나 이 서체가 보인다

입력 : 2019.06.25 03:00

헬베티카(Helvetica)

BMW, 3M, MUJI, BASF, LG, 아메리칸 항공, 노스페이스….

분야도, 규모도 서로 다른 이 기업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회사 로고에 쓰인 글꼴입니다.

글꼴은 디자인적 일관성을 가진 글자의 묶음을 뜻합니다. 서체(書體·font)라고도 하죠. '명조체' '굴림체' '궁서체' 등이 바로 한글 글꼴이에요.

헬베티카는 글로벌 기업 로고, 상표 디자인에 자주 쓰이는 글꼴입니다
헬베티카는 글로벌 기업 로고, 상표 디자인에 자주 쓰이는 글꼴입니다. 튀지 않고 조형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디자인이기 때문입니다. /각사(社) 홈페이지 캡처
이 기업들이 로고에 쓴 라틴 알파벳 글꼴은 '헬베티카(Helvetica)'입니다. 아메리칸항공과 LG는 로고를 새로 손보면서 이제는 글꼴이 달라졌지만 나머지 기업은 지금도 헬베티카를 로고에 쓰고 있어요. 헬베티카는 1957년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서체로, 스위스를 지칭하는 라틴어 '헬베티아'에서 이름을 땄는데요. 별명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글꼴'입니다.

라틴 알파벳 서체는 디자인 측면에서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한글 명조체처럼 글자 획 끝에 흔히 '삐침'이라 부르는 돌기가 달린 건 '세리프(Serif)', 한글 고딕체처럼 삐침이 없는 건 '산세리프(Sans Serif)'라고 부르는데요. 서체는 세리프, 산세리프 여부와 그 생김새, 굵기에 따라 미묘하게 성격이 달라집니다. 헬베티카는 산세리프 진영의 대표 주자로, 그 모습이 매우 중립적입니다. 조형적으로 무척 안정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제 성격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무색무취함이 매력이죠. 형태 또한 간결하고 가독성까지 좋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이든 마법처럼 잘 어울리죠. 생전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의 기본 서체로 헬베티카를 선택했을 정도였어요.

다만 개성 있는 디자인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헬베티카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모두 헬베티카만 선호하면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사라져 세상이 단조롭고 똑같아 보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에서 헬베티카는 기업 로고는 물론 거리를 채운 포스터, 안내 표지판, 웹사이트, 세금 고지서 등 곳곳에서 등장해 일상을 빼곡히 감쌀 정도죠. '헬베티카를 보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농담까지 있거든요.

헬베티카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이 서체를 둘러싼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찬사와 비난을 다룬 다큐멘터리 '헬베티카'가 2007년 개봉되기도 했어요. 글꼴을 주요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는 처음이었죠. 이제 헬베티카는 단순한 서체를 넘어 디자인과 사회를 엮어서 바라볼 수 있는 창으로 여겨진답니다.

지난 4월 헬베티카 글꼴 저작권을 가진 '모노타입'은 새로운 버전의 헬베티카를 선보였어요. 디지털 시대에 맞춰 스마트폰, 모니터, 전광판 등의 여러 스크린에서 더 잘 읽히도록 손질한 '헬베티카 나우(Helvetica Now)'죠.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발전을 멈추지 않는 독보적 서체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전종현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