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외교사절로 美 갔다가 "서양 배우겠다"… 28세에 고교 입학

입력 : 2019.06.25 03:00

[최초의 국비 미국 유학생 '유길준']
조선이 美와 조약 맺고 답례로 보낸 '보빙사'로 美 방문했다가 유학 결정
수학 100점·지학 94점 등 '우등생'

2019 국제축구연맹 U-20(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이 준우승을 차지했어요. 특히 2011년부터 스페인에서 축구 유학을 한 이강인(18) 선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요즘은 이렇게 축구 유학까지 떠나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바다 건너 서양으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어요. 오늘은 한반도가 위기에 빠진 1883년, 출세길을 마다하고 첫 서양 국비유학생이 된 유길준(1856~1914)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출세 포기하고 유학길 오른 엘리트

1883년 7월 조선인 11명이 제물포항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어요.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는데, 답례차 외교 사절을 파견한 것이죠. 이 사절단을 '답례로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사신'이란 뜻으로 보빙사(報聘使)라고 불러요.

[뉴스 속의 한국사] 외교사절로 美 갔다가
/그림=안병현
사절단 우두머리는 조선 개화파 대표 민영익이었는데, 유길준은 그 수행원으로 미국에 따라갔어요. 유길준은 노론 명문인 기계 유씨 출신으로 과거를 보고 입신양명하는 게 충분히 가능했어요. 그렇지만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한다며 이미 일본 게이오기주쿠(현 게이오대)에서 1년 반 동안 유학을 했죠. 민영익은 그런 유길준을 아껴 미국에도 동행했어요.

미국 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은 유길준은 귀국 시기가 닥치자 민영익에게 "서양 학문을 배워 조선의 개화와 발전을 위해 힘쓰고 싶다"고 했어요. 유길준은 이렇게 조선 최초의 서양 유학생이 됐어요.

"87점은 100점보다 13점 낮아"

미국에 남은 유길준은 상투를 자르고 1884년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거버너 덤머 아카데미(Govenor Dummer Academy)'라는 사립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28세였죠.

그는 하버드대 입학을 목표로 맹렬하게 공부합니다. 유길준은 편지에 "지구과학 시험에서 94점,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맞아 매우 기쁘다", "어제 시험에서 87점을 맞았다. 평균보다 16점 높지만 만점인 100점보다 13점 낮다"고 썼어요.

근대화를 위해 '서유견문'을 쓰다

유길준이 유학 중이던 1884년 12월 6일, 조선에선 '갑신정변'이 일어났어요. 김옥균, 박영효 등 젊은 개화파들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새 정권을 세우려 했죠.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났어요. 민씨 일파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거든요.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처형됐어요.

영어와 국제법에 밝은 인재가 필요했던 고종은 유길준에게 귀국을 명했어요. 유길준은 귀국길에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1885년 12월 16일 제물포항에 내립니다.

당시 조선 정세는 살벌했어요. 청나라 권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 내정에 일일이 간섭했어요. 위안스카이는 "서양·일본에 유학 간 조선 유학생들이 돌아오면 개화를 추진할 것"이라며 유학생이 귀국하는 족족 처형했지요.

유길준은 다행히 처형을 피했지만 7년 가까이 연금됩니다. 유길준은 이 기간에 비공식적으로 고종의 자문역을 맡습니다. 동시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지요. 자신이 돌아본 서양 문물을 설명하고 입헌군주제, 법치주의 같은 개념도 소개했죠. 그는 자기 돈을 들여 1894년 일본에서 '서유견문' 1000부를 찍어 정부 고위 관료와 지식인들에게 전달합니다. 비록 얼마 안 가 금서(禁書)가 됐지만, 후배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줬지요.


[美 대학 첫 한국인 졸업자 '변수']

한국인 중 처음으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유길준과 함께 1883년 민영익을 수행해 미국에 갔던 변수(邊燧·1861~1891)입니다.

미국에 남은 유길준과 달리 변수는 귀국해 갑신정변에 가담합니다.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이듬해 메릴랜드대 농과에 입학해 4년 뒤 졸업했어요. 1893년 컬럼비안대(현 조지워싱턴대) 의대를 졸업한 서재필 박사보다 2년 빨랐죠.

변수는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부터 미국 농무부에 근무했어요. 그러나 대학 졸업 후 4개월 만인 1891년 10월 열차 사고로 요절했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