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시노폴리, 오페라 지휘 중 심장마비… 무대 위에서 삶 마감

입력 : 2019.06.22 03:00

[전성기에 세상 떠난 지휘자들]
정신의학 전공하고 지휘자로 활동… 정신분석 통해 독창적으로 곡 해석

최근 네덜란드 출신의 명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90)가 90세를 맞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오는 9월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를 끝으로 65년간의 지휘자 생활을 마무리하기로 했어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런던 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시카고 심포니 등을 이끌었던 대가의 영광스러운 퇴장이죠.

지휘자는 장수하는 직업으로도 유명합니다.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지휘하다 보면 멋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운동 효과도 엄청나다고 해요. 말년까지 지휘하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앙드레 프레빈(1929~ 2019)도, 86세에 빈 신년 음악회를 지휘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프레트르(1924~2017)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휘대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어느 분야나 그렇듯, 지휘자 중에도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등진 천재들이 있었습니다.

주세페 시노폴리(왼쪽)는 지휘 중에 심장마비로, 이스트반 케르테스(가운데)는 바다 수영 중 큰 파도에 휩쓸려서, 귀도 칸텔리는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전성기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지휘자들을 보면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이 떠오릅니다. 주세페 시노폴리(왼쪽)는 지휘 중에 심장마비로, 이스트반 케르테스(가운데)는 바다 수영 중 큰 파도에 휩쓸려서, 귀도 칸텔리는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나 이들이 남긴 음악은 지금도 사랑받고 있죠. /게티이미지코리아
먼저 언급할 이름은 이탈리아 출신의 귀도 칸텔리(1920~1956)입니다. 밀라노 근교 노바라에서 태어난 칸텔리는 역시 지휘자였던 아버지에게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해,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수학했어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칸텔리는 전쟁 직후 라 스칼라 오페라단을 지휘하면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후 1949년 토스카니니의 NBC 교향악단의 부지휘자로 일하게 된 칸텔리는 1950년에는 영국 무대에 데뷔해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합니다. 한때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후보로도 거론됐고요.

그는 1956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시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를 지휘한 직후 라 스칼라 극장 음악 감독이 됐어요. 그러나 영광의 순간도 잠시, 라 스칼라 연주 일주일 뒤 뉴욕 필을 지휘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숨졌습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칸텔리는 깔끔하고 강렬한 지휘 스타일로 많은 팬이 있었죠. 특히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이스트반 케르테스(1929 ~1973) 역시 불의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더 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지휘자예요. 케르테스는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죠.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해 친척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계속 음악을 공부했어요.

전후에 케르테스는 헝가리 국립오페라를 거쳐 함부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에서 경력을 쌓고서 30대 초반부터 세계를 무대로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필, 런던 심포니, 빈 필 등을 지휘해 최고의 평가를 받은 케르테스는 1973년 독일 밤베르크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됐어요. 같은 세대인 주빈 메타, 클라우디오 아바도, 세이지 오자와 등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았죠.

그러나 그해 4월 케르테스는 이스라엘 여행 중 텔아비브 인근 해변에서 수영하다 강한 파도에 휩쓸려 숨졌어요. 런던 심포니와 녹음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집, 이스라엘 필과 함께 한 슬라브 무곡집과 빈 필과의 브람스 교향곡집 등이 케르테스의 대표 음반입니다.

55세에 별세한 이탈리아의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1946~2001)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진 음악가였어요. 베네치아 태생인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파도바대에서 의학을 전공해 신경정신과 의사가 됐어요. 그렇지만 음악에 대한 정열이 엄청나 작곡도 따로 공부했죠.

그는 작곡 스승이었던 작곡가 브루노 마데르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지휘자가 된 것도 스승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였어요. 빈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익힌 그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베르디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오페라를 지휘하며 경력을 시작했어요.

정신과 의사였던 시노폴리는 작곡가의 정신 분석을 통해 독창적으로 곡을 해석했어요. 시노폴리의 이름이 크게 알려진 것은 1984년 리카르도 무티의 후임으로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면서였죠. 당시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전집은 지금도 베스트셀러입니다. 시노폴리는 1992년부터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이 되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등 후기 낭만 레퍼토리에서 많은 명반을 녹음했습니다.

그러나 시노폴리는 무대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2001년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3막을 지휘하다 심장마비가 온 겁니다. 그는 결국 회복하지 못했어요. 흡연과 음주를 즐기며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인생의 전성기에 아쉬운 삶을 마감해야 했던 지휘자들은 이제 기록으로만 만날 수 있지만, 넘치는 에너지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합니다. 지휘대 위에서 뜨거운 정열로 예술혼을 불살랐던 천재 지휘자들의 모습은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뇌종양·신경마비 겪고도 불사신처럼 일어나 지휘대로]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시노폴리, 오페라 지휘 중 심장마비… 무대 위에서 삶 마감
여러 번 사고를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다시 일어나 활동을 이어간 지휘자도 있습니다. 독일의 거장 오토 클렘퍼러(1885~1973·사진)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에게 인정받아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어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오랫동안 이끌며 지금도 찬사를 받는 음악을 남겼죠.

그는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사고를 많이 당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일부 신경이 마비되기도 했고, 공항 계단에서 넘어져 오랫동안 재활을 하기도 했죠. 또 담배를 물고 잠이 들었다가 큰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일어나 다시 지휘대로 돌아왔죠. "단 한 번도 지휘를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클렘퍼러의 고집과 끈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가 남긴 훌륭한 음반을 듣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