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목숨이 걸린 연주, 피아니스트는 쇼팽 발라드 1번을 쳤다

입력 : 2019.06.08 03:05

칸 영화제 속 클래식

지난주 대한민국 영화계에 경사가 있었죠. 세계 최고 권위의 프랑스 칸 국제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이미 유럽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가 인정받은 지 오래지만, '기생충'이 인정받은 건 우리 모두에게 뿌듯한 소식이었어요. 이 영화는 높은 완성도와 풍부한 상징성, 날카로운 풍자를 고루 갖추고 있어요.

20세기가 낳은 화려한 종합 예술인 영화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클래식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영화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동안 칸영화제에서도 뛰어난 음악 영화, 그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테마로 한 음악 영화가 여럿 주목을 받았죠.

200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감독)가 대표적입니다. 실존 인물이었던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의 파란만장한 2차 세계대전 생존기였죠. 가족이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뒤 홀로 목숨을 건진 슈필만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아슬아슬하게 독일군을 피해 다닙니다.
200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 슈필만(맨 왼쪽)은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닙니다. 그는 게토에서 독일군 장교를 마주치면서(가운데) 피아니스트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합니다. 201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아무르’(맨 오른쪽)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곡을 삽입했어요.
200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 슈필만(맨 왼쪽)은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닙니다. 그는 게토에서 독일군 장교를 마주치면서(가운데) 피아니스트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합니다. 201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아무르’(맨 오른쪽)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곡을 삽입했어요. /씨네월드·조이앤컨텐츠그룹·티캐스트

몸도 마음도 지친 슈필만이 폐허가 된 게토(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독일군 장교와 마주치는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누구지?" "저는… 피아니스트입니다." 슈필만은 마침 옆방에 있던 낡은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피아니스트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 순간에 슈필만이 선택한 곡은 폴란드 작곡가 쇼팽의 발라드 1번이었죠.

불꽃처럼 뜨거운 연주를 감상하던 독일군 장교는 슈필만이 죽음을 피해 도망 다니는 유대인임을 알아차립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할 것을 알고 있었던 장교는 슈필만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며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떠납니다. 슈필만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장교는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소련군의 포로가 돼 얼마 후 세상을 떠났죠.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다룬 만큼 쇼팽 음악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이 영화에서는 발라드 1번 외에 녹턴 C# 단조,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즈 22번 등이 나옵니다.

2012년 황금종려상을 받은 프랑스 영화 '아무르'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함께하는 영화입니다. 은퇴한 피아노 교사 안느는 남편 조르주와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불행과 마주 서게 됩니다. 건강하던 안느가 마비 증상을 보이며 병석에 눕게 된 것이죠. 설상가상으로 치매 증상까지 찾아온 안느를 조르주는 간병인도 없이 몸소 정성껏 보살핍니다. 떨어져 사는 딸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아내에 대한 사랑과 꼿꼿한 자존심으로 버텨 오던 조르주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죠.

평생을 함께해 온 노부부의 사랑과 추억, 아울러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별과 죽음을 꾸밈 없이 그려낸 걸작 '아무르'는 이미 2001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미카엘 하네케가 감독했어요. 하네케는 작품에서 클래식 음악을 즐겨 쓰는데요, '아무르'에서는 여주인공 안느가 피아노 교사였기에 피아노곡이 자주 나옵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과 베토벤의 바가텔 등이 대표적이죠. 프랑스 출신 현역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가 안느의 옛 제자 역할로 영화에 출연해 직접 연기와 연주를 선보입니다.

칸영화제는 그 시작부터 클래식 음악과 함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공식으로 열린 첫 영화제(1946)에서는 그랑프리(당시 최고 상)가 여러 영화에 돌아갔는데요, 수상작 중 하나인 영국 영화 '밀회'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주제 음악으로 쓰였습니다. 원제가 '짧은 마주침(Brief Encounter)'인 영화는 작은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짧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죠. 평범한 주부인 로라와 의사인 알렉은 우연히 기차역의 찻집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죠. 두 사람은 매주 목요일 오후에 만나 애정을 확인하지만,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만남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알렉이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이별을 고합니다. 낭만적이면서도 격정적 분위기를 지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은 영화 전체를 감싸듯이 울리면서 달콤함과 아픔이 함께 녹아있는 사랑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그려냅니다.

악보를 통해 소리만으로 표현되던 음악이 영상을 만나 일으키는 시너지는 기적과 같은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오랜 시간을 거쳐 검증된 클래식 음악이 영화에 쓰이면 그 결과는 늘 기대 이상이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3번… 영화계서 사랑받는 음악이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 1943)는 러시아의 마지막 낭만파 작곡가로 불려요. 그의 작품은 선율이 아름답고 악상 전개가 극적이라 여러 영화에 쓰였답니다.

1954년 영화 '랩소디'에서는 당대 최고의 미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스위스의 한 음악 학교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다양한 클래식 작품을 연주하죠. 엔딩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제임스가 연주하는 곡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1996년 영화 '샤인'도 데이비드 헬프갓이라는 실존 인물의 음악 인생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과 함께 그렸죠. 호주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헬프갓은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어렵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을 연주하다 쇼크로 무대에서 쓰러집니다.

헬프갓은 이후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지만, 지인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재기에 성공해요. 클래식 팬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버드맨'에서는 교향곡 2번이 흐르죠.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