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동귀의 심리학이야기] 거짓말 반복하다 실제라고 믿어… 불안·죄책감도 없죠
리플리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은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Highsmith)가 1955년에 쓴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랍니다.
리플리는 재능 있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인물이에요. 재벌 아들 필립을 따라다니며 친하게 지내지만 필립은 그런 리플리를 무시합니다. 리플리는 보복으로 필립을 죽여버린 뒤, 죽은 친구 행세를 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겨요.
주변 사람들이 필립을 찾기 시작하자 리플리는 마치 필립이 살아있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을 속이죠. 필립의 친구 프레디가 리플리를 의심하자, 리플리는 마치 필립이 프레디를 죽인 것처럼 꾸며 프레디를 제거합니다.
리플리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인물이에요. 소설과 영화가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뒤, 여기 나오는 리플리처럼 자신이 상상한 허구 세계가 사실이라고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증상을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자기 거짓말을 현실이라 믿어
일반인은 거짓말을 하면 들통날까 봐 불안해하지만, 리플리 증후군에 빠진 사람은 불안감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요. 이들은 자기네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환상이 실제 현실이라고 믿어버리거든요. 그리고 그런 허구를 계속 믿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때로는 절도나 사기 같은 범죄도 저지르지요. 거짓말을 반복하다 보니 스스로 거짓말을 믿게 되어 버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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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박다솜
우리나라에서도 2007년 리플리 증후군에 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한 젊은 큐레이터(미술 전시 기획자)가 일찌감치 미술계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국내 최대 비엔날레 총감독 물망에 올랐어요. 이 큐레이터는 평소 자기가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행세했는데, 비엔날레 총감독을 뽑는 과정에서 그게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문제는 모든 거짓말이 들통난 뒤에도 이 큐레이터가 "나는 정말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게 맞는다"고 계속 주장했다는 점이에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 사건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재능 있는 신씨(The Talented Ms. Shin)'라는 헤드라인을 달았어요. 소설 제목 '재능 있는 리플리씨'를 흉내 낸 거죠.
◇관심을 끌고자 거짓말을 하는 '뮌하우젠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한 현상으로 '뮌하우젠 증후군(Münchausen syndrome)'이 있어요. 18세기 독일 실존 인물인 뮌히하우젠(Münchhausen) 남작을 모델로 한 소설집 '허풍선이 뮌하우젠 대공의 놀라운 모험'에서 이름을 따왔어요. 모델이 된 뮌히하우젠은 유쾌한 재담가였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청난 허풍이 섞인 모험담을 마치 사실처럼 늘어놓으며 사람들 관심을 끌어보려는 뮌하우젠으로 묘사됩니다.
1951년 영국의 정신과 의사 리처드 애셔(Asher)가 이 소설에 착안해 '실제로는 신체적인 이상이 없음에도 단지 관심을 끌기 위해서 질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증상'에 '뮌하우젠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증세를 보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 또는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아픈 척 연기를 합니다. 어린 시절 과보호로 인해 자립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타인의 관심을 끄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리플리 증후군과 뮌하우젠 증후군은 거짓말을 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어요. 리플리 증후군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뮌하우젠 증후군은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는 거랍니다.
☞기억,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아
실제로 자신이 하지 않았는데, 마치 그 일을 직접 한 것처럼 믿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심리학자 아바나 토머스(Thomas) 등은 2002년 '상상'이 기억을 왜곡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보여줬어요. 연구팀은 '펜으로 종이에 이름 쓰기' '연필 깎기' '코에 숟가락 올려놓고 중심 잡기' '비닐 백에 발 넣기' 같은 54개 행동 목록을 마련한 뒤 대학생 210명을 불렀어요. 학생들에게 18가지 행동은 직접 해보게 하고, 18가지는 상상만 하도록 했어요. 나머지 18가지는 어떤 행동인지 말해주지 않았죠.
연구팀은 다음 날에도 학생들을 불렀어요. 이번에는 54개 행동 중 일부를 상상으로만 해보라고 했죠.
연구팀은 2주 뒤 학생들을 다시 불러 54개 행동 리스트를 주면서 직접 해봤던 행동이 무엇인지 물어봤어요. 그런데 여러 학생이 실제로 그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직접 해봤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어요.
이 실험은 우리의 상상이 기억을 왜곡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결과가 리플리 증후군이나 뮌하우젠 증후군에서처럼 새빨간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겠죠. 때로 우리의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 기억이 100% 맞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대화할 필요가 있어요. 기억은 틀릴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