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지옥을 고통 대신 '환생의 희망'으로 새롭게 표현해냈죠

입력 : 2019.05.18 03:08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 展

작품1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 실크스크린에 글로스.
작품1 - ‘셰이프 오브 워터’, 2017, 실크스크린에 글로스. /롯데뮤지엄·ⓒJames Jean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오직 상상에만 의존해야 하니까요. 물론 여러 예술가가 이미 상상해 온 것들을 참고로 할 수는 있지요.

지옥을 예로 들어볼까요? 르네상스의 대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 '최후의 심판'은 지옥이 주제입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최근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지옥 장면이 나옵니다. 지옥을 실제로 다녀온 사람은 설마 없겠지만, 이런 작품들 덕분에 우리는 지옥이 어떤 곳일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어요. 한 사람이 상상한 내용 위에 다른 사람이 상상한 것이 덧대어지고, 그렇게 해서 상상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통하는 의미를 갖게 돼요. 이를 상징이라고 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오래된 상징들을 디지털 시대의 감각으로 혼합하여 전 세계 미술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예술가가 있어요. 대만계 미국 화가 제임스 진(40)입니다. 진의 작품은 어디서 본 듯 낯설지 않으면서 환상적인 분위기가 풍겨요. 2017년에는 영화감독 3명으로부터 포스터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한꺼번에 받았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도 높습니다. 그 영화 포스터 중 하나가 '셰이프 오브 워터'〈작품1〉랍니다.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한 영화죠.

롯데뮤지엄에서 9월 1일까지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이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요. 섬세한 볼펜 드로잉부터 만화잡지 표지에 쓰였던 이미지와 영화 포스터, 대형 회화 작품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진의 이모저모를 골고루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옥 이야기를 계속해볼까요? 서양에서는 지옥을 '인페르노(inferno)'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불바다를 뜻해요. 유럽인들에게 지옥이 그리스도교적인 개념에서 비롯되었다면, 아시아인들에게는 주로 불교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해요. 하지만 지옥을 불바다로 상상했다는 점에서는 두 종교가 비슷합니다.

작품2 - ‘지옥-붉은 불’, 2019, 캔버스에 아크릴.
작품2 - ‘지옥-붉은 불’, 2019, 캔버스에 아크릴. /롯데뮤지엄·ⓒJames Jean

작품2는 제임스 진이 그린 지옥의 모습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인페르노'이지만 불이 뻘겋게 활활 타오르는 무서운 지옥이 아니라, 차라리 물속 풍경 같아요. 물방울처럼 생긴 머리 모양의 어린아이들이 그곳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혹시 지옥에 빠진 누군가의 영혼이 아닐까요? 영혼들은 물길을 헤엄쳐 다니며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나 봅니다. 그림의 가운데 있는 꽃망울 주변으로 나비들이 맴돌고 있어요. 나비는 서양의 그림 속에서 죽은 이의 영혼과 재탄생을 암시해 왔답니다. 화가는 형벌의 고통이 아니라 환생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평화로운 지옥세계를 그렸어요.

작품3 - ‘곤충채집(Aurelians)’, 2016, 캔버스에 아크릴.
작품3 - ‘곤충채집(Aurelians)’, 2016, 캔버스에 아크릴. /롯데뮤지엄·ⓒJames Jean
제임스 진은 꽃과 나비, 그리고 어린이가 나오는 동화 같은 장면을 자주 그렸어요. 작품3에서도 노란 여름 햇살 아래 소녀들이 꽃밭에서 노닐며 나비를 쫓고 있어요. 제목 '아우렐리안(aurelians)'은 영어로 '곤충 채집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로마제국을 다스렸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이름이기도 해요. 꽃과 나비를 보면서 권력의 정점과 아름다움의 절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그림입니다.
작품4 - ‘허무’, 2008, 종이에 유채.
작품4 - ‘허무’, 2008, 종이에 유채. /롯데뮤지엄·ⓒJames Jean
작품4에서는 거울을 보며 치장하는 나비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의 오른쪽 아래로 바닥에 나비의 날개 한쪽이 떨어져 있어요. 이는 아무리 아름다운 나비일지라도 언젠가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암시입니다. 여인의 뒤쪽으로 병풍이 펼쳐져 있는데, 또 다른 세상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아요. 병풍 뒤쪽에 그려진 '떠다니는 아이'는 10년 후 화가의 그림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나타납니다.
작품5 - ‘후손-푸른 나무’, 2019, 캔버스에 아크릴.
작품5 - ‘후손-푸른 나무’, 2019, 캔버스에 아크릴. /롯데뮤지엄·ⓒJames Jean

작품5를 보세요. 아이들은 구름 위로 국화, 모란, 연꽃 등이 활짝 핀 하늘 꽃밭을 떠다니고 있어요.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의 동자들을 연상하게 하는 이곳은 혹시 꿈속 나라가 아닐까요? 포근한 꽃잎들이 받아줘서 아이들은 밑으로 떨어지거나 부딪혀도 다칠 위험이 없어요. 단지 깜짝 놀라 꿈속 세상에서 깨어버릴지도 몰라요.

대만에서 태어나 세 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 제임스 진은 완전히 아시아인이 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미국인도 아닌 것 같았다고 해요. 살면서 늘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문화 사이를 배회하며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대요.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작가는 스스로 떠다니는 아이가 되어 자신의 상상 속 세상에 실컷 머물곤 한답니다.

우리 친구들도 이번 전시에서 제임스 진을 따라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해보세요.

[제임스 진에 영감을 준 화가]

제임스 진에게 영감을 준 화가가 있어요.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랍니다.

카스틸리오네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예수회 선교사로 1715년 중국에 파견됐어요. 그는 청나라에서 청 황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궁정화가로 50년 동안 활동합니다. 이름까지 중국식인 랑스닝(郞世寧)으로 바꿨어요.

그는 중국의 전통 묵화 기법과 서양의 사실적 묘사법을 두루 익혀서 동서양 미술 사조가 융합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냈어요. 카스틸리오네의 유명한 작품 '백 마리의 말들'은 제임스 진이 태어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어요. 제임스 진은 이 그림을 보고 지금처럼 동서양 문화를 함께 담아내는 작품 활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