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온난화의 축복? 한국에서 유럽까지 바닷길 열흘 단축

입력 : 2019.05.17 03:09

북극 항로

지구온난화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인간이 지구온난화의 덕을 보는 일도 한 가지는 있을 것 같아요. 북극 빙하가 녹는 바람에, 역사상 처음으로 동서양을 잇는 새로운 해운 루트가 실현 가능한 단계에 접어들었거든요.

이 새로운 해운 루트는 '북극 항로(Nort- hern Sea Route)'라고 불려요. 약자로 간단히 NSR이라고도 하죠. 평면 지도만 봐서는 북극 항로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힘들어요. 지구가 구(球)라는 걸 염두에 둬야 이해가 잘 간답니다.

아시아와 유럽 잇는 가장 짧은 길

북극 항로는 러시아의 광활한 북쪽 해안선과 거의 평행선을 달려요. 서유럽과 북유럽을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연결하는 최단 루트죠. 이제까지는 동서양을 오가는 거의 모든 선박이 유라시아대륙을 남쪽으로 빙빙 에둘러 갔어요.

가령 한국 화물선이 부산에서 유럽까지 가려면 일단 공해상으로 나간 뒤 남중국해를 거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있는 믈라카 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가로질러 이집트 수에즈운하를 통과해야 했어요. 아니면 아프리카 대륙 남단까지 가서 희망봉을 돌아야 했죠.
러시아 핵추진 쇄빙선 ‘야말’호(왼쪽에서 첫째)가 북극해 얼음을 부숴서 뱃길을 내고 있어요. 북극 항로는 극동과 유럽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바닷길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며 이전보다 항해가 쉬워져 관심이 늘고 있어요.
러시아 핵추진 쇄빙선 ‘야말’호(왼쪽에서 첫째)가 북극해 얼음을 부숴서 뱃길을 내고 있어요. 북극 항로는 극동과 유럽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바닷길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얼음이 녹으며 이전보다 항해가 쉬워져 관심이 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북극 항로가 상용화되면 이 길이 훨씬 빨라져요. 북극 항로를 이용하면, 동북아를 떠난 선박이 서유럽 해운의 중심지인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가는 길이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루트보다 40%, 희망봉을 도는 루트보다 60% 짧아져요. 그러면 연료비는 대폭 줄고, 수출은 늘어날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으로 가면 34일 걸려요. 북극 항로가 열리면 열흘가량 앞당겨진 23일이면 갈 수 있대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길이 왜 지금에야 관심을 모으고 있는 걸까요?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이 바닷길은 1년 내내 두꺼운 빙하에 덮여 있었어요. 일부 구간은 얼음에 덮이지 않는 기간이 연중 두 달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최근 30년간 북극 항로에 있는 빙하가 40%나 줄어들었어요. 그중 13%는 지난 10년 동안 사라졌고요. 빙하가 없어진 결과, 2017년 8월 역사상 처음으로 화물선이 얼음을 깨는 쇄빙선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북극 항로를 완주할 수 있었어요.

스탈린이 뚫고 푸틴이 되살린 루트

러시아가 2만4000㎞에 달하는 자국의 북쪽 해안선의 지도를 작성한 건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 때였어요. 이후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했을 때(1924~1953) 소련 정부가 이 척박한 지역에 공업 시설과 주거지를 세웠어요.

이를 위해 소련 선박들이 1930년대부터 북극 항로를 따라 항해하며 북쪽 해안선을 따라 들어선 공업 시설과 주거지에 연료와 생필품을 공급하기 시작했어요. 1957년 소련은 세계 최초의 핵추진 쇄빙선 '레닌호'를 진수했지요. 소련이 그 뒤에 만든 또 다른 핵추진 쇄빙선 '아티카호'는 1977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북극에 도달한 선박이 됐어요.

하지만 소련이 망한 뒤 이 지역에 대한 투자도 사라졌어요. 소련 북쪽 해안선을 따라 들어선 공업시설은 텅 빈 채 삭아가고, 북극 항로도 사실상 잊혔지요. 그러다가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 빙하가 녹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해 러시아 경제를 되살리면서 북극 항로도 다시 관심을 받게 됐어요. 2018년 북극 항로를 지나간 화물은 그 전해의 두 배에 달했어요. 러시아 전문가들은 2025년까지 이 수치가 네 배가 될 거라고 보고 있어요.

러시아, 핵추진 쇄빙선 개발 박차

지금도 대부분의 선박은 북극 항로 전체를 단독으로 항해하진 못해요. 적어도 일부 구간은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핵추진 쇄빙선 함대를 강화하고 있어요. 러시아는 앞으로 새로운 핵추진 쇄빙선 모델 여덟 가지를 개발해, 2030년 현장에 투입할 계획이에요. 북극 항로에 현금 투자가 대폭 늘어날 거란 전망도 나와요. 중국도 북극 항로에 관심을 보이고 있거든요.

인간은 지구온난화 때문에 북극 항로를 다닐 수 있게 됐어요. 지구온난화는 슬픈 일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제까지보다 연료를 덜 소비하고 탄소를 덜 배출하게 된 거죠.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