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일제강점기 한국화의 진수… 은은하거나 대담하거나

입력 : 2019.05.04 03:07

한국화의 두 거장, 이상범·변관식 展

한국에서는 어디에 살더라도 산이 보입니다. 산은 저 멀리에도 보이고 집 가까이에도 있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으면서 나무와 바위와 물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산은 한국의 자연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어요. 산은 계절마다 색깔을 바꿉니다. 봄이면 살구꽃이 피고, 여름에는 숲이 우거지며,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드는가 하면, 겨울에는 눈으로 하얗게 뒤덮입니다. 산에는 흥겨운 물소리도 있습니다. 언덕이 완만한 곳에는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절벽이 높은 곳에는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지요.

가장 한국적인 산을 그려낸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분은 이상범(1897~1972)이고, 다른 한 분은 변관식(1899~1976)이에요. 서울 삼청로에 있는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다음 달 16일까지 두 화가의 대표작을 각 50여 점씩 총 100여 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상범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어요. 태어난 지 1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은 가족은 서울 돈화문 부근 셋방에서 쪼들리며 살게 됐어요. 이상범은 중학교 등록금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 장학금을 받고 서화미술회라는 미술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어요.

일제강점기 동안 이상범은 전국 규모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 상을 받으면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어요. 이후에는 신문사에 취직해 미술 기자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작품① - 이상범, ‘고원무림’, 1968, 종이에 수묵담채, 76.5x192.5㎝.
작품① - 이상범, ‘고원무림’, 1968, 종이에 수묵담채, 76.5x192.5㎝. /갤러리현대·‘한국화의 두 거장­청전·소정’展
작품1은 가로로 길게 냇물이 흐르고 그 위쪽으로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있는 그림입니다. 자연 속에 푹 파묻힌 사람도 그림 속에 보이네요. 보따리를 소와 함께 나누어 등에 지고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는 남자예요. 자그마하게 그려져서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아무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 같습니다.

이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붓으로 찍은 점들과 더불어 짧게 끊어 날카롭게 그은 붓질이 눈에 띕니다. 멀리서 보면 부드러운 안개 같고 가까이서 보면 각진 붓질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상범 그림이 지닌 고유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작품② - 이상범, ‘산가효색’,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91x176㎝.
작품② - 이상범, ‘산가효색’, 19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91x176㎝. /갤러리현대·‘한국화의 두 거장­청전·소정’展
작품2는 1950년대에 그린 것으로 평화로운 산촌의 모습입니다. 그림의 맨 아래에는 냇물이 흐르고, 중앙에는 집과 사람이, 그리고 윗부분에는 둥그렇게 완만한 산이 보이는 삼단의 화면 배치는 이상범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어요. 맑고 연한 먹으로 은은하면서도 푸근하게 안개에 싸인 산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촉촉하면서 상큼한 새벽 공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이상범보다 두 살 어린 변관식은 황해도 옹진에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11세가 되던 해부터 서울에 있는 외할아버지댁에 살게 됐어요. 그 외할아버지가 바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이에요. 조석진은 처음에는 손자가 화가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손자가 워낙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자 생각을 바꿔 그림 수업을 받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변관식은 이상범과 같은 시기에 서화미술회에서 공부하게 되었어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화풍의 그림들을 접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작품③ - 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55x117㎝.
작품③ - 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55x117㎝. /갤러리현대·‘한국화의 두 거장­청전·소정’展
작품3은 변관식이 그린 금강산입니다. 다른 사람은 시도하지 않았던 대담한 구도로 여럿을 놀라게 했어요. 기둥같이 솟아오른 큰 바위를 화면 가까이에 바짝 붙여 배치하고 그 뒤로 먼 경치를 그린 거예요. 가까이 보는 시선과 멀리 보는 시선이 화면 하나에 압축되어 있지요. 또한 겹겹이 덧칠해서 바위의 질감을 묘사한 방식도 인상적이에요. 먼저 칠한 먹물이 마른 후에 덧칠을 하면 앞서 그린 선이 뭉개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결을 남기거든요. 촉촉한 물기가 듬뿍 어린 청전의 그림과 대조적으로 변관식의 그림은 건조한 붓의 거친 흔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작품④ - 변관식, ‘농촌의 만추’, 1957, 종이에 수묵담채, 115.3 x 264㎝.
작품④ - 변관식, ‘농촌의 만추’, 1957, 종이에 수묵담채, 115.3 x 264㎝. /갤러리현대·‘한국화의 두 거장­청전·소정’展

작품4는 추수를 다 마친 늦가을 농촌을 보여주는 변관식의 그림입니다. 먹색보다는 흙색이 주가 되어 농촌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어요. 하늘을 아예 그리지 않은 채 그림 전체가 땅으로 꽉 채워진 구성이 아주 개성적입니다.

이상범과 변관식은 젊은 시절에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 대한 사랑을 조용히 그림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두 사람은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감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개발해 한국화의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