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경제만 바꾸자는 鄧과 달리 '정치도 개혁' 외치다 실각
입력 : 2019.05.01 03:00
[후야오방 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과 개혁·개방 주도한 인물… 그가 죽자 시민들 톈안먼 광장서 추모
두 달 동안 胡 재평가·민주화 요구… 무력 탄압으로 톈안문 사태 일어났죠
그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어요. 중국 정부가 이를 유혈 진압해 공식적으로만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지요. 이게 바로 '톈안먼(天安門) 사태'랍니다.
이 때문일까요? 중국 현대사를 뒤흔든 인물 중 하나지만 그의 고향 마을에서만 조촐하게 추모 행사가 열렸을 뿐 중국 공산당은 당 차원에서 어떤 행사도 열지 않았어요. 후야오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사람
후야오방은 1915년 11월 후난(湖南)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4세에 공산당 운동에 가담해 열한 살 위 덩샤오핑과 인연을 맺었죠.
2차 세계대전 전후 중국 대륙에서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치열하게 내전을 벌였어요. 이 싸움에서 공산당이 승리해 1949년 중국 난징(南京)에 있던 국민당 정부가 바다 건너 타이베이(臺北)로 옮겨갔어요.
이후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절대 권력자가 됐어요. 그는 1966~1976년 10년간 "자본주의·봉건주의 문화와 사상을 뿌리 뽑겠다"면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강제 노동을 시켰어요. 이게 바로 '문화대혁명'이죠. 덩샤오핑과 후야오방도 이때 나란히 숙청당해 고초를 겪었어요.
- ▲ 1989년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추모하러 모인 중국 대학생과 시민들이 베이징 톈안먼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서 있어요. 기념비 앞에 후야오방 영정이 놓여 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후야오방은 이 작업을 주도했어요. 1982년 후야오방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자 '덩샤오핑의 후계자는 후야오방'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어요.
◇경제만 개혁하자는 鄧, 정치도 바꾸자는 胡
하지만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은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어요. 경제 개혁에만 집중하자는 덩샤오핑과 달리 후야오방은 공산당 1당 독재 체제도 좀 더 민주적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1986년 중국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어요. 개혁·개방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탓이 컸지요. 후야오방은 무력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다가, 1987년 실각했어요. 중국 공산당은 후야오방이 '자본가 편을 들었다'고 비판했지요.
◇그의 죽음이 촉발한 '톈안먼 사태'
후야오방은 2년 뒤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졌어요. 후야오방이 숨지자, 베이징 대학생과 시민들이 베이징 도심 톈안먼 광장에 모여 그를 추모했어요. 후야오방이 대학생과 지식인을 보호하려다가 권력을 잃고 쫓겨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어요.그가 보기 드물게 청렴한 정치인이었다고 칭송하는 이도 많았고요. 당시 베이징대에는 '죽어야 할 자는 안 죽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해요. 시위가 두 달 가까이 계속되자, 결국 중국 지도부는 잔혹한 유혈 진압을 자행했어요.
후야오방은 태어난 지 100년이 된 2015년 복권됐어요. 그렇지만 중국 당국은 여전히 톈안먼 사태를 '폭동'이라 규정하고 있어요.
[문화대혁명 비판했던 1976년 '1차 톈안먼 사태']
1989년 톈안먼 사태에 앞서 1976년 4월에도 톈안먼광장에서 큰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1차 톈안먼 사태'라고 부르기도 해요.
당시 중국 최고 권력자는 아직 마오쩌둥(毛澤東)이었어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2인자였죠. 독재자 마오쩌둥과 달리 저우언라이 총리는 합리적이고 청렴한 지도자로 존경받았어요.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던 인파가 곧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시위대로 변했어요.
당시 부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은 이런 시위가 일어난 데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어요. 하지만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숨지면서 판세가 뒤집혔어요. 마오쩌둥 시대에 권력을 누리던 세력이 쫓겨나면서 그해 4월 톈안먼광장에서 일어난 시위도 '정의로운 시위'였다고 재평가받았고, 중국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도 실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