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가시면류관·십자가 조각, 성당 3개 지을 돈 들여 사왔죠
입력 : 2019.04.24 03:00
[火魔 피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유물]
1238년 루이 9세가 파리로 사온 성물… 예루살렘·콘스탄티노플 거쳐 왔어요
18세기 프랑스혁명 때도 살아남았죠
지난 1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했어요.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해요. 공식 명칭은 그래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인데 보통 노트르담 대성당이라고 부르죠. 이 성당은 12세기부터 짓기 시작해서 14세기에 완공됐어요. 뾰족한 첨탑,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대표되는 고딕 양식을 갖추고 있죠.
- ▲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보관해온 가시면류관입니다. 가시면류관을 크리스털 통에 넣고 황금으로 장식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머리에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13세기 예루살렘 왕국에서 성 십자가 등과 함께 사들였어요. /AP 연합뉴스
◇성당 3개 건축비보다 비싼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
1238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제국의 수도)을 점령하고 있던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로부터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 등을 13만5000리브르를 주고 사들였어요. 당시 루이 9세가 성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생트 샤펠 성당 건축비가 4만 리브르였다고 하니 성당 3개를 짓고도 남을 어마어마한 돈인 겁니다. 유물들은 이듬해인 1239년 파리에 도착했어요. 독실한 신자였던 루이 9세는 왕관과 가운을 벗고 맨발로 유물을 뒤따랐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최고는 가시면류관이었죠. 유물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에 모셔졌다가 생트 샤펠로 옮겨졌지요.
◇예루살렘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파리로 옮겨져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이 정말 예수가 머리에 썼던 것인지,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일부인지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어요. 그렇지만 오랜 세월 성물로 여겨져 온 것은 맞아요. 4세기경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 기록을 보면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을 성물로 여기고 숭배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기록에 따르면 성 십자가는 4세기 중반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성지순례 도중에 발견했다고 전해져요. 가시 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들은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팔려온 가시 면류관과 달리 십자가 파편들은 여러 기독교 국가들과 성당으로 흩어졌어요. 노트르담 대성당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묘교회,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 등도 성 십자가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고 해요. 다만 모조품일 가능성도 있어요. 중세 시대가 끝날 때쯤에는 진짜 성 십자가 조각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당과 국가가 너무 많아 종교 개혁가 칼뱅은 "전 세계의 성 십자가 조각을 모으면 배 하나를 채울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노트르담에 있는 가시면류관과 성 십자가 조각도 진짜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자체로 역사를 담은 인류의 유산이지요.
[프랑스혁명 후 잊힌 노트르담… 빅토르 위고 소설로 복원 시작]
노트르담 대성당은 헨리 6세의 즉위식(1431),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재판(1456)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등 중요한 행사가 열려 '프랑스의 심장'으로 불렸죠.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 때 파손되면서 제대로 수리하지 못하고 방치돼 왔어요.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는 1831년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어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꼽추와 집시의 사랑, 15세기 다양한 계급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죠. 책에는 노트르담 성당의 건축에 대해서만 묘사하는 내용도 있어요. 그의 작품 덕에 많은 사람이 다시 노트르담 대성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45년부터 프랑스 정부가 노트르담 복원 사업을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