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캔버스 위의 실험, 사진처럼 그렸다가 영화처럼 그렸다가

입력 : 2019.04.20 03:05

데이비드 호크니 展

사진과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진은 멈춰 있고, 영화는 움직인다는 점이죠. 사진은 셔터가 찰칵하는 한순간을 담고 있지만, 영화는 시간의 흐름 속에 여러 장면이 연결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린 작가가 있어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 서부에서 주로 활동한 데이비드 호크니(Hockney·82)입니다. 살아 있는 작가 중 가장 비싼 값에 그림이 팔리는 현대미술의 거장이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는 8월 4일까지 영국 테이트미술관과 공동으로 기획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열고 있어요.

사진 같은 그림은 알겠는데, 영화처럼 움직임을 품은 그림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화가가 모델을 이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느라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는 뜻이에요.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이미지를 모아 한군데에 배열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거지요.

과거 미술 시간에 배운 것과는 정반대 방식이에요. 전통적으로 화가 지망생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한자리에서 그리도록 배웠어요. '원근법' 때문이었죠. 원근법은 가까운 사물은 크고 뚜렷하게, 먼 곳에 있는 사물은 작고 흐릿하게 그려서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인데, 가깝고 먼 비율을 정확하게 하려면 화가의 위치가 한곳에 고정되어 있어야 해요. 화가가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림을 그리면 멀리 있던 것이 가까워지고 가깝던 것이 멀어질 테니까요.
사진1 - ‘더 큰 첨벙’, 캔버스에 아크릴릭, 1967.
사진1 - ‘더 큰 첨벙’, 캔버스에 아크릴릭, 1967. /서울시립미술관·ⓒDavid Hockney

호크니도 초기작에서는 원근법을 따라 정지된 순간을 그렸어요. 대표적인 예가 〈작품1〉입니다. 흐린 날이 잦은 안개 낀 런던에 살다가 햇살이 강렬한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뒤 그린 작품인데요. 이때부터 호크니의 그림은 아주 선명해졌어요. 맑은 날씨 덕분에 그동안 침침하고 탁해 보이던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그는 빛을 머금은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이 비친 투명한 물이나 유리를 그리는 작업에 기쁨을 느꼈습니다. 당시에 그는 '수영장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수영장을 자주 그렸어요.

이 그림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튀어 오른 물벼락만 하얗게 두드러져 있어요. 누군가 막 다이빙대 위에서 '풍덩' 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나 봅니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을 그림으로 포착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호크니는 '풍덩' 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놓고 그걸 보면서 그렸다고 해요. 정지된 순간이라는 느낌을 그림에서 강하게 받게 됩니다.

사진2 - ‘클라크 부부와 퍼시’, 1970, 캔버스에 아크릴릭.
사진2 - ‘클라크 부부와 퍼시’, 1970, 캔버스에 아크릴릭. /서울시립미술관·ⓒDavid Hockney
〈작품2〉 역시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에요. 수영장에 이어 호크니는 초상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택합니다. 미술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인 초상화를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스냅 사진처럼 보여줬어요. 자연광이 들어오는 한낮에 부부가 자기 집에서 편안하고 느슨한 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이 두 사람은 막 사진을 찍으려는 화가의 카메라를 향해 눈길을 주는 것처럼 보여요.
사진3 - ‘빌리와 오드리 와일더’, 1982, 폴라로이드사진.
사진3 - ‘빌리와 오드리 와일더’, 1982, 폴라로이드사진. /서울시립미술관·ⓒDavid Hockney
호크니는 1980년대 붓을 잠시 놓고 아예 사진만으로 그림을 구성해보기로 합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그림은 아니지만 〈작품3〉을 보세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 144장을 퍼즐 맞추듯 구성한 작품이에요.

사진을 이어 붙인 '포토 콜라주'이지만 이 그림부터 호크니는 작품에 움직임을 반영합니다. 144컷 속에는 144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숨어 있어요. 화가가 서 있던 자리를 조금씩 옮겨서 찍은 사진들이거든요. 호크니는 피카소의 복수 시점, 한눈에 보기에는 너무 커서 걸어 다니면서 봐야 하는 중국 두루마리 그림 등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사진4 - ‘호텔 우물의 경관III’, 1984, 석판화.
사진4 - ‘호텔 우물의 경관III’, 1984, 석판화. /서울시립미술관·ⓒDavid Hockney

〈작품4〉는 가운데 우물이 놓여 있고 그 주위를 둥근 기둥들이 둘러싼 장소를 그린 것인데, 마치 볼록거울로 비춘 듯 기둥들이 우리를 향해 튀어나와 보입니다.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보이는 원근법과 반대되는 효과를 낸 거예요. 〈작품5〉는 가로가 12m, 세로가 4.6m로 호크니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캔버스 50개를 연결한 대작인데, 정말로 숲속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면서 보게 됩니다. 작품 속에 깃든 호크니의 수많은 시선을 제대로 탐색하려면 우리도 이 그림 앞에서 이쪽저쪽 자꾸 움직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5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 2007, 50개의 캔버스에 유채.
사진5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 2007, 50개의 캔버스에 유채. /서울시립미술관·ⓒDavid Hockney

☞단일 시점과 복수 시점

원근법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쓰여요.

정확한 원근법은 고정된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본 한 방향의 시선, 즉 단일 시점을 전제로 합니다. 원근법의 법칙은 이후 500년 가까이 서양 미술을 지배했어요. 원근법은 그림의 사실적 느낌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됐지만 대부분의 그림이 엇비슷한 구도가 되게 만들었어요.

19세기 후반부터 화가들은 원근법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어요. 호크니에게 큰 영감을 준 파블로 피카소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본 후 그림을 그렸는데, 하나의 그림이 여러 개의 시선을 가졌다고 해서 이를 복수 시점이라 부릅니다.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