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식물이야기] 향기 萬里까지 퍼진다고 붙은 이름… 실제로는 향 강하지 않죠

입력 : 2019.04.12 03:05

만리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 무학대사는 왕명에 따라 전국 풍수지리를 살피며 새 조선의 도읍지를 찾아다녔어요. 지금의 서울 성동구 자리에서 좋은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한 농부가 십 리만 가면 더 좋은 자리가 있다고 알려줬어요. 여기서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생겼답니다.

지명뿐 아니라 식물 이름 중에서도 이처럼 거리와 관련된 것이 있어요. 지금 만개한 '만리화'가 바로 그 주인공이지요. 만리화는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경상북도나 강원도 등지의 햇빛이 잘 드는 산자락이나 계곡 주변에서 자라는 식물이에요. 은은한 꽃향기가 '만리(萬里)'까지 멀리 퍼진다고 이름이 만리화가 됐답니다. 다만 향은 강한 편이 아닙니다. 만리화는 원래 천상에 피어 있던 꽃이라 지상에서는 향이 약하다는 설화가 있어요.
봄철 활짝 피어난 만리화 모습입니다. 개나리와 가까운 친척뻘이라 구별하기 쉽지 않아요.
봄철 활짝 피어난 만리화 모습입니다. 개나리와 가까운 친척뻘이라 구별하기 쉽지 않아요. /김용국 기자
4월이 되면 만리화는 개나리와 닮은 꽃을 피우는데요. 뾰족한 노란색 꽃잎 넉 장이 꽃 하나를 이뤄 무더기로 피고 키도 1m 남짓으로 낮게 자라요. 만리화와 개나리가 가까운 친척뻘이기 때문에 만개한 꽃만 봐서는 구별하기 어렵답니다. 개나리꽃은 줄기 전체를 감싼 듯 여기저기 붙어서 피지만, 만리화는 줄기에 간격을 두고 빙 둘러 한 포기를 만든답니다. 또 개나리의 줄기를 살살 반으로 갈라보면 대체로 텅 비어있는데, 만리화 줄기에는 계단 모양으로 가로줄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둘 다 한국 특산종입니다.

오리나무 이름도 거리 때문에 붙었답니다. 오리(五里·약 2㎞)마다 심어 이정표로 삼았다는 오리나무는 산기슭이나 논둑의 습지 근처에서 자라는 키가 아주 큰 나무인데요. 키가 곧게 자라는 데다 나무껍질이 회갈색이고 세로로 불규칙하게 갈라져 아주 눈에 잘 띈답니다. 오리나무는 잎이 동그랗고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어요. 20세기 초부터 '오리목(五里木)'이라는 한자 표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이정표 삼아 심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어요. 오리나무보다 더 띄엄띄엄 20리 간격으로 심었던 나무가 느릅나뭇과(科) 시무나무예요. '20리목(二十里木)'이라 부르죠. 조선 후기 김삿갓이 시무나무 아래서 쉰밥을 얻어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요.

지금은 오리나무의 꽃을 볼 수 있어요. 노란색 포슬포슬한 수꽃 이삭이 가지에서 1~3개씩 짝을 이뤄 주렁주렁 아래로 처져 있고요, 수꽃이 꽃가루를 날리고 쭈그러지고 나면 빨간색 암꽃 이삭이 곧게 얼굴을 내밀지요. 10월에 열리는 열매는 솔방울을 줄여놓은 듯한 모습이라 귀여워요.

만리화와 오리나무, 시무나무 이름의 어원이 100% 확실하지는 않아요. 오리나무가 진짜 오리새에서 나온 이름이란 주장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름에 들어있는 숫자 때문에 우리가 이 식물들을 더 쉽게 기억하고 아낄 수 있어요.



최새미·식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