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2000년대 초반 北, 과자봉지·포스터도 손으로 그렸대요

입력 : 2019.03.23 03:05

영국인이 모은 '북한 그래픽디자인'

최근 들어 TV와 신문에 북한 관련 뉴스가 거의 매일 나오고 있어요. 북한이 과연 핵을 포기할지, 미·북 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평화는 어떻게 될지 모두 가슴을 졸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수많은 뉴스를 접하면서도 북한에 대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곳의 최고지도자와 몇몇 고위 관료의 모습뿐입니다.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볼 기회는 거의 없지요. 북한 사회는 오래도록 외부인들의 접근이 제한되어 왔기 때문이에요. 평범한 북한 사람들의 하루하루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건 외국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일 거예요. 영국의 전시기획자 니콜라스 보너(Bonner)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보너는 25년 동안 북한 우표, 포장지, 포스터 등을 수집했어요. 그리고 2018년 봄에 그 수집품들을 영국의 한 갤러리에서 '북한에서 만들다(Made in North Korea)'라는 전시를 통해 공개했는데요. 예상치 못하게 이 전시회에 방문객이 넘쳐났어요. 호응에 힘입어 갤러리 측에서는 세계 순회 전시를 계획했고 그 첫 번째 도시로 서울이 선정됐어요. 다음 달 7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 가면 '영국에서 온 Made in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보너가 모은 북한의 그래픽디자인 200여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사진1 - ‘기차가 그려진 사탕 상자’.
사진1 - ‘기차가 그려진 사탕 상자’.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왔습니다. 보너는 1993년 관광객 신분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파는 사탕이나 음료의 알록달록한 포장 디자인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사진1〉은 당시에 산 사탕 박스의 앞면인데, 손으로 그린 풍경화가 이색적이죠. 동해의 아름다운 해안가를 기차가 달리는 모습입니다. 왼쪽 아래에는 '은하수 사탕'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진2〉는 파란 바탕에 장미꽃이 그려진 과자 상자 포장인데, '문봉 과자'라는 손 글씨 느낌의 글자 디자인이 눈에 띕니다. 한국도 1970년대에는 이와 비슷한 느낌이 풍기는 과자 봉지들이 있었다고 해요. 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추억에 잠길 수 있는 복고풍 디자인일 겁니다.
사진2 - ‘장미 문양이 그려진 과자 상자’.
사진2 - ‘장미 문양이 그려진 과자 상자’.
북한은 외국과의 교류가 상당 부분 통제돼 있어요. 디자인 분야에서도 외국 유행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처지죠. 그러다 보니 상품 포장지 디자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적인 유행에 따르지는 못했어요. 나쁘게 보면 구식이지만, 좋게 보면 복고풍의 예스러운 특징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할 수도 있어요. 영국인 보너의 눈에는 그런 점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보너는 북한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아예 '고려투어'라는 북한 전문 여행사를 차렸습니다. 여행사 대표 신분으로 평양에 자주 드나들면서 여러 물건을 수집할 수 었었죠.
사진3 - ‘고려항공 기념우표’.
사진3 - ‘고려항공 기념우표’.
〈사진3〉은 1978년에 북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예요. 기념우표는 말 그대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우표인데, 관광지의 기념 엽서처럼 실제 사용보다는 주로 간직하기 위한 용도로 판매됐어요. 1978년은 엔진의 힘으로 가동되는 비행기가 처음 하늘을 난 지 75주년이 된 해라고 합니다. 우표에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선진국 항공사의 비행기들을 그려놓았는데,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북한의 '고려항공'도 그려져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는 선전이 담겨 있지요.
사진4 - ‘물고기 가공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
사진4 - ‘물고기 가공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

〈사진4〉는 1981년에 제작된 북한의 공공 캠페인 포스터예요. 살기 좋은 북한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물고기 가공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라는 표어를 내건 이 포스터는 열심히 일하면서 환하게 웃는 여성 근로자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사진5 - ‘새해 카드’.
사진5 - ‘새해 카드’.

〈사진5〉는 2005년 연하장인데,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와 더불어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쓴 젊은 여성이 건강한 미소를 짓고 있네요. 손으로 그리는 방식이 20년 전 캠페인 포스터와 똑같습니다. 요즘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포스터들은 컴퓨터로 이미지를 만들고 디지털 방식으로 출력해낸 것이라 손으로 작업하고 판화로 찍어낸 옛 포스터와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지요. 북한에서도 2000년대 중반부터는 손으로 직접 그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방법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해요.

이번 전시는 특히 어른들에게 어린 시절 생일이나 성탄절에 받았던 종합선물세트의 추억을 불러일으킬지 몰라요. 북한의 옛 사탕 봉지나 포스터를 보면 촌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정겹거든요. 가까이 있지만 이념 차이로 도무지 거리를 좁히기 쉽지 않은 북한 실상이 어떤지, 한 걸음 다가설 기회랍니다.

'최첨단 1 번수들'

北, 개인보다 집단에 초점 맞춰… 청소년 만화도 승인 받아야

1990년대 초반 북한은 만화가들에게 청소년을 위한 만화를 그리라고 장려했어요. 그 결과 '최첨단 1 번수들'〈사진〉 같은 공상과학 만화를 비롯해 여러 만화책이 나왔지요.

그렇지만 북한에서는 이러한 오락 만화도 정부가 기획하고 승인하는 대로 그려야 합니다. 북한은 어린 독자들이 재미로 읽는 만화조차 정치적 이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기 때문이죠. 가령 전투 만화에서도 영웅적인 개인이 초인적인 힘으로 싸우는 장면은 많지 않고, 여러 사람이 뭉쳐 집단적으로 힘을 모아 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그려낸다고 합니다. 개인보다 집단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