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2차 대전 때 독일에 땅 뺏긴 나라들, 런던에 정부 세워 반격

입력 : 2019.03.22 03:00

[망명정부]
지난 22일 스페인 北대사관 기습한 '천리마 민방위' 북한 망명정부 자처
2차 대전 당시 망명정부 인사들 수천명이 연합군에서 일했어요

지난달 22일 스페인에서 얼굴에 복면을 쓴 10인조 그룹이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직원들을 결박하고 4시간 동안 감금했어요. 스페인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이들은 북한 대사관에 있던 컴퓨터, 외교문서, 직원들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미리 준비한 고급 차량에 싣고 달아났지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최근 이 사건을 벌인 세력이 북한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비밀 단체 '천리마 민방위'라고 보도했어요. 이 단체는 자신들이 "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단일하고 정당한 조직"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망명정부'를 자처하며 부도덕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건 이 단체가 처음이 아니에요. 역사 속엔 망명정부를 둘러싸고 스파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위험천만한 장면이 많았답니다.

"유럽에 불을 질러라"

1942년 5월 27일 프라하 거리에서 체코 슬로바키아 젊은이 두 명이 인류 역사상 가장 흉악한 인간 중 한 명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치 비밀경찰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Heydrich·1904~1942)였죠. 나치 정권에서 홀로코스트를 결정한 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하이드리히였어요. 히틀러는 그를 '강철 심장을 가진 사나이'라 불렀죠.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후에는 이 나라 모라비아 지방과 보헤미아 지방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겼어요.

2차대전 종전 직후 영국군에 편입된 체코슬로바키아 1기갑여단 병사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영토를 빼앗긴 프랑스·벨기에·체코슬로바키아·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국가는 영국 런던에 망명정부를 꾸립니다. 사진은 2차대전 종전 직후 영국군에 편입된 체코슬로바키아 1기갑여단 병사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입니다. /위키피디아
체코슬로바키아 젊은이들은 영국 특별작전국(SOE) 요원들이었어요. 특별작전국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만든 비밀 조직이에요. 스파이 임무와 유격대 기능을 합친 곳으로, "(독일 지배 아래 놓인) 유럽에 불을 지르라"는 게 처칠이 내린 미션이었죠.

체코슬로바키아 요원들은 영국에서 특수 훈련을 받은 뒤 낙하산을 타고 몰래 조국에 침투했어요. 이날 하이드리히가 탄 차가 다가오자 요원들이 반자동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날렸어요. 총격전과 추격전이 이어졌지요. 이 사건으로 하이드리히는 치명상을 입었어요. 이후 나치는 보복으로 리디체라는 마을을 골라 15세 이상 남성 전원을 학살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강제 수용소에 보냈어요. 이 마을 사람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저항 세력을 몰래 지원해왔다는 이유였어요.

프라하에서 일어난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중 일어난 가장 대담한 암살 사건으로 꼽혀요. 당시 특별작전국 요원들은 나치 병력에 맞서 6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모두 전사했어요. 이들이 마지막까지 버티던 교회 건물은 나치에 저항한 이들의 묘소로 잘 보존되어 있답니다.

런던에 몰린 각국 망명정부

특별작전국은 2차 대전 때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 이 사건 말고도 엄청난 작전을 여럿 수행했어요. 1940~1944년 사이에 유럽 각국에서 뽑힌 요원들이 이 조직을 채웠어요. 이들에게 영국은 '마지막 희망의 섬'이었어요. 나치의 힘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곳이 영국이었으니까요. 당시 영국에는 10여 개국의 각국 망명정부가 있었어요.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이었죠.

이 망명정부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들이 참여함으로써 연합군이 정당한 참전 명분을 얻었어요. 해당 국가 국민에겐 망명정부의 존재가 희망의 신호등이었지요. 이 망명정부 인사 수천명이 연합군에서 일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서구 세계가 특정 국가의 반군이나 해외 망명정부를 인정하고 지원하는 풍경은 2차 대전 이후 점차 사라졌어요. 1961년 미국이 쿠바 반군을 지원하며 쿠바를 침공한 것도, 2003년 다국적 연합군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모두 정치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지요.

'자유 조선' 망명 정부?

전 세계가 '천리마 민방위'에 주목하는 건 이 단체가 북한 정권을 대신하는 망명정부를 자처하고 있어서예요. 이들은 지난 1일 '자유 조선(Free Joseon)'으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들은 홈페이지에서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가 조선인들을 대표했듯 자신들이 북한 사람들을 대표한다며 새롭고 자유로운 북한을 세우겠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이 단체 구성원들은 탈북민일까요, 아니면 한국 보수 세력일까요, 혹은 재미 교포들일까요?

미국과 한국 정보 당국이 이들을 지원하는지는 불분명해요. 이 단체는 2017년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북한 요원들에게 암살당한 뒤, 그의 유족을 구출해 보호했어요. 하지만 이 단체가 마드리드의 북한 대사관을 습격했다는 보도가 정확하다면 대사관 습격은 사실 외교적인 범죄예요. 아마 북한 정보 당국도 '천리마 민방위'를 뒤쫓고 있을 거예요. 저는 '천리마 민방위'가 방어를 잘하고 있길 바라요.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