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英 여성운동가들은 격투기까지 배우며 투쟁했어요

입력 : 2019.03.06 03:00

[여성 참정권 얻기까지…]
1910년, 여성도 투표권 달라며 시위
경찰로부터 자신의 몸 지키기 위해 日 주짓수 배워 '서프러짓수'로 불려

20세기 초 영국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일본 격투기 배우기 붐이 불었다는 사실, 알고 계세요? 영국 여성 참정권자들은 호신술로 주짓수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서프러짓수(Suffragitsu)'라는 단어까지 나왔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하는 단어 '서프러제트(Suffragette)'에 격투기 '유술'(주짓수·Jiu-jitsu)을 합성한 말이에요. 영국 여성운동가들이 호신술을 익혀야 했던 이유가 뭘까요?

◇참정권 얻으려면 내 몸부터 지켜야

이제 여성 참정권은 당연한 권리가 됐지요. 그렇지만 100년 전만 해도 세계 대다수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영국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영국은 일찍이 여러 여왕이 있었어요.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을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성군이었죠. 하지만 그건 군주들의 이야기일 뿐, 19세기까지도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1900년대 초반 영국 여성들은 단식 투쟁, 집회, 때로는 불까지 지르면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달라(Votes for Women)"이라고 외쳤습니다.

20세기 초 영국 여성운동가 사이에 격투기 주짓수 붐이 불었어요.
20세기 초 영국 여성운동가 사이에 격투기 주짓수 붐이 불었어요.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하는 단어 '서프러제트'에 격투기 '주짓수'를 합성한 서프러짓수라는 말까지 나왔죠. 사진은 당시를 만화화한 책 표지입니다. /JET CITY COMICS
여성도 투표할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주장이 그때 그 시절엔 '불온 선동'에 해당됐어요. 경찰은 시위 주동자를 수시로 연행해갔어요. 여성운동가들이 평화적으로 구호만 외쳐도 군중 속에 있던 남성들이 여성 시위대를 위협하거나 때렸죠. 1910년 '검은 금요일'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 300여 명이 영국 의회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100명 이상이 구속되고 그 과정에서 2명이 숨졌어요.

당시 서프러제트를 이끌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Pankhurst)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지킬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눈길을 끌었던 게 일본 무술 주짓수였습니다.

여성운동가들 사이에는 마침 이디스 개러드(Garrud)라는 주짓수 고수가 있었어요. 당시 영국 경찰은 키 178㎝ 이상만 뽑았어요. 개러드는 키가 150㎝밖에 안 되지만,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큰 경찰들을 주짓수로 제압해 이름을 날렸어요. 상대방 힘을 역이용해 제압하는 게 주짓수의 특징이지요. 남성보다 힘이 약한 여성에게 잘 맞았어요. 개러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동참하면서 아예 런던에 여성 전용 체육관을 차려 호신술로 주짓수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호신술을 익힌 여성 30명은 자기네 지도자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지키는 호위부대 역할을 합니다. 당시 영국 언론은 이들을 팽크허스트의 '아마존'이라고 불렀어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 아마존에 비유한 거지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오세요"

아마존 소리까지 들었으니 엄청나게 우락부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잘 꾸미고 다녔다고 합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딸 실비아는 "엄마와 언니 같은 서프러제트는 무리해서라도 좋은 옷을 사 입었다"고 회상했어요.

이건 여성 참정권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여러 매체가 툭하면 서프러제트를 깎아내리는 시사만평을 싣던 시대였어요. 만평에 나온 서프러제트는 두꺼운 안경을 끼고, 뾰족구두 대신 덧신을 신은 매력 없는 여성들이기 일쑤였어요.

그래서 이들은 보라색, 흰색, 녹색과 같이 눈에 띄는 색깔 드레스를 입고, 배지와 모자 등도 최대한 멋을 내서 입었다고 해요. 특히 언론이 주목하는 집회·시위 현장에서는 예쁘게 보이기 위해 더 신경을 썼어요.

이런 노력은 성과를 거둔 것 같아요.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100년 전 여성운동을 되돌아보는 분석 기사에서 "여성 참정권자들이 옷을 잘 입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서프러제트 수가 늘었다"고 썼어요.

영국은 1918년 30세 이상 여성에게 투표권을, 1928년부터는 21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줍니다. 영국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서방 국가에서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기 시작합니다. 전쟁 기간에 전쟁터로 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후방에서 군수 물품 생산, 보급, 행정 업무 등을 담당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올라간 측면이 있다고 해요.

오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실은 누군가가 얼마나 힘들게 싸워서 얻은 것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밀, '자유론'아내와 함께 썼죠]

'자유론'을 쓴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1867년 영국 하원에서 여성도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죠. 이보다 앞선 1850년 밀은 '여성해방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합니다. 어떻게 밀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참정권자가 됐을까요?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해리엇은 밀의 지적·사상적 동반자로 여성 참정권자이기도 했어요. 앞서 말한 '여성해방에 대하여'는 밀 부부의 공동 작품이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상 남편 존 스튜어트 밀이 혼자 썼다고 알려야 했습니다. 이 글에서 밀 부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금지된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제시돼야 한다."

밀은 해리엇이 '자유론' 같은 대표 저작에도 상당 부분 이바지했다고 회고했어요.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