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40년 전 테헤란, 지금과 '딴판'… 차도르 대신 미니스커트
입력 : 2019.02.27 03:00
[이란 혁명]
팔라비 왕조, 이슬람 율법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옷 입을 수 있게 했어요
부정부패·빈부격차 커지자 비판 받아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왕조 물러나면서 지금처럼 차도르 의무화, 술·담배 금지
지난달 이란 경찰청장이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키면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이슬람 율법에 개는 부정한 동물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란에서는 술 마시는 것도 불법, 미니스커트 입는 것도 불법입니다. 이렇듯 이란은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죠. 그런데 40년 전 풍경은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미니스커트 입던 중동의 '파리'
40년 전 2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정을 몰아냈어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Paris)'라고 했어요. 이란 여성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어요. 요즘 이란 여성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여성이 연상되는 오늘날 풍경과는 딴판이었죠. 프랑스 못지않은 포도주 생산국으로 '시라즈' 와인 원산지였어요.
◇여성들이 미니스커트 입던 중동의 '파리'
40년 전 2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정을 몰아냈어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Paris)'라고 했어요. 이란 여성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어요. 요즘 이란 여성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 차도르로 온몸을 휘감은 여성이 연상되는 오늘날 풍경과는 딴판이었죠. 프랑스 못지않은 포도주 생산국으로 '시라즈' 와인 원산지였어요.
- ▲ 1971년 이란 테헤란대 여학생들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캠퍼스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1979년 이란혁명 이후로 불가능해진 풍경이죠. /위키피디아
초대 국왕 레자 칸의 뒤를 이은 아들 레자 팔라비(1941~1979)가 1963년 '백색 혁명'을 단행하면서 더 구체화합니다. 토지 개혁, 국영기업 민영화, 문맹 퇴치 운동, 여성 참정권 부여 등이 주요 내용이었죠.
◇"친서방 독재 왕조 물러나라"
그러나 백색 혁명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도시 빈민은 갈수록 늘어났어요. 토지개혁 과정에서 나라에 땅을 빼앗긴 지주와 성직자는 왕조의 개혁에 반대했어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독재 왕정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란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1902~ 1989)는 1963년 팔라비 왕조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나섰어요. 그는 이듬해 프랑스로 강제 추방당했어요.
그래도 반발이 이어지자 팔라비 국왕은 비밀 경찰과 군대를 동원했어요. 그렇지만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종교인, 지식인, 청년이 늘어났죠. 이슬람 성직자는 팔라비 왕조가 이슬람 율법을 저버리고 '친서방' 정책을 편다고 공격했어요. 이란 젊은이들은 무능한 부패 정권이라고 비판했죠.
1978년 9월 테헤란 잘레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요. 이란에서는 이날을 '검은 금요일의 학살'이라 불러요. 팔라비 왕조는 피를 흘리지 않는 '백색' 혁명이라고 했는데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왕정은 물러났는데…
시위가 점점 커지자 레자 팔라비 국왕은 1979년 1월 망명합니다. 호메이니가 귀국해 2월 11일 이란 혁명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하죠. 선거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이슬람 성직자가 우리나라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국회 역할을 모두 담당하는 '헌법수호위원회'를 통제하면서 이슬람 신정(神政)국가 성격도 생깁니다. 지금 일상생활에서도 이슬람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이란은 이렇게 탄생했죠.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으면서 여성들은 다시 모두 차도르를 입어야 했어요. 마약, 술, 담배는 물론 서양의 음악과 영화도 금지됐죠. 호메이니는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비공개 재판을 통해 팔라비 왕조 관료를 사형하는 등 반대파를 몰아붙입니다. 왕정을 몰아내겠다는 취지로 혁명에 동참했던 이란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는 목숨을 건지고자 이란을 떠나야 했어요.
이코노미스트는 "이란 혁명 40년이 지난 지금, 매년 고등교육을 받은 이란인 15만명이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나고 있다"고 했어요.
[호메이니와 인터뷰 중 차도르를 벗어버린 기자]
그는 1979년 호메이니를 인터뷰하며 "왜 불편한 차도르를 여성에게 강요하느냐"고 했습니다. 호메이니는 "외부인이 이슬람 문화에 왈가왈부하지 마라. 싫으면 벗어도 좋다"고 했어요. 팔라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도르를 벗었습니다. 화가 난 호메이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다음 날 이어진 인터뷰에서 팔라치는 다시 차도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호메이니는 기가 차서 웃어버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