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해외에 독립선언서 처음 알린 미국인의 가옥 복원돼요

입력 : 2019.02.26 03:09

1923년에 지어진 서울 행촌동 고택 '딜쿠샤'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그런데 이 나무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집 한 채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행주대첩의 주인공 권율 장군의 집터에 세운 이 건물을 사람들은 한때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추측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DILKUSHA 1923'의 의미

"이거 도대체 뭐라고 쓴 거지?"

1995년부터 이 행촌동 건물에 '언론 박물관'을 만들려고 조사를 벌이던 서울시 관계자들은 건물 기초 부분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어요. 'DILKUSHA 1923'. 도무지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답니다.

수수께끼는 2006년 이 집을 찾아온 백발 서양인이 풀어줍니다. 87세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1919~2015)는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내가 어렸을 때 서울에서 살던 집을 찾아 달라"고 의뢰했어요. 김 교수가 두 달 만에 찾아낸 그 집은 바로 행촌동 은행나무 옆집이었죠. 서울에 온 노인은 벅찬 표정으로 털어놨어요.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오. 내 어머니께서 인도 러크나우를 여행하다 감명 깊게 본 궁전 명칭을 1923년에 지은 이 집 이름으로 삼으셨다오."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리다

미국 네바다주 출신인 브루스의 아버지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1897년 조선에 와 광산업과 무역업에 종사했고, 일본에서 영국인 배우 메리 테일러(1889~1982)를 만나 1917년 결혼합니다. 테일러 부부는 서울 서대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요. 메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를 낳은 것은 1919년 2월 28일, 바로 3·1운동 발발 하루 전 일이었습니다.

딜쿠샤 설명 일러스트
그림=안병현

그런데 이때 테일러 부부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내용을 알 수 없는 인쇄물을 가져와 침상 밑에 숨기는 것이었어요. 그 인쇄물의 정체를 안 순간 그들은 까무러치게 놀랐어요. "이건 조선의 독립선언서잖아!" 남편 앨버트는 UPI와 AP통신의 임시 특파원이 돼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타전했고, 고종 황제의 국장, 재판 과정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딜쿠샤, 문화재가 되다

딜쿠샤 위치 지도

테일러 부부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던 중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기로 했어요. 이 집이 '딜쿠샤'였습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감금됐다가 추방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오려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1948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뒀고, 아내 메리는 남편 뜻을 따라 유해를 한국 땅에 안장했습니다. 그 뒤 딜쿠샤는 잊히고 방치돼 여러 사람이 무단으로 거주하기도 했어요.

딜쿠샤는 2017년 등록문화재 687호가 됐고, 내년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됩니다. 서울시는 다음 달 1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딜쿠샤의 복원 공사 현장을 공개한다고 해요. 서울역사박물관은 테일러가(家)에서 기증받은 자료를 토대로 3월 10일까지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 목걸이'를 열고 있어요.

☞독립운동 도운 외국인들 딜쿠샤에서 만나게 된대요

딜쿠샤의 등록문화재 명칭은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에요.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양식 가정집이었다고 합니다. 2층에는 거실과 응접실이 있었어요. 응접실에선 서울 시가지와 한강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해요.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는 증·개축으로 훼손된 집을 보고 "그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딜쿠샤는 복원 공사가 끝나면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들을 조명하는 전시관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