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해외에 독립선언서 처음 알린 미국인의 가옥 복원돼요
1923년에 지어진 서울 행촌동 고택 '딜쿠샤'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는 500년 넘은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그런데 이 나무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집 한 채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행주대첩의 주인공 권율 장군의 집터에 세운 이 건물을 사람들은 한때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추측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DILKUSHA 1923'의 의미
"이거 도대체 뭐라고 쓴 거지?"
1995년부터 이 행촌동 건물에 '언론 박물관'을 만들려고 조사를 벌이던 서울시 관계자들은 건물 기초 부분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어요. 'DILKUSHA 1923'. 도무지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업이 중단되고 말았답니다.
수수께끼는 2006년 이 집을 찾아온 백발 서양인이 풀어줍니다. 87세 미국인 브루스 테일러(1919~2015)는 서일대 김익상 교수에게 "내가 어렸을 때 서울에서 살던 집을 찾아 달라"고 의뢰했어요. 김 교수가 두 달 만에 찾아낸 그 집은 바로 행촌동 은행나무 옆집이었죠. 서울에 온 노인은 벅찬 표정으로 털어놨어요.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란 뜻이오. 내 어머니께서 인도 러크나우를 여행하다 감명 깊게 본 궁전 명칭을 1923년에 지은 이 집 이름으로 삼으셨다오."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리다
미국 네바다주 출신인 브루스의 아버지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1897년 조선에 와 광산업과 무역업에 종사했고, 일본에서 영국인 배우 메리 테일러(1889~1982)를 만나 1917년 결혼합니다. 테일러 부부는 서울 서대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요. 메리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를 낳은 것은 1919년 2월 28일, 바로 3·1운동 발발 하루 전 일이었습니다.
- ▲ 그림=안병현
그런데 이때 테일러 부부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내용을 알 수 없는 인쇄물을 가져와 침상 밑에 숨기는 것이었어요. 그 인쇄물의 정체를 안 순간 그들은 까무러치게 놀랐어요. "이건 조선의 독립선언서잖아!" 남편 앨버트는 UPI와 AP통신의 임시 특파원이 돼 독립선언서를 외신으로 처음 타전했고, 고종 황제의 국장, 재판 과정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해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딜쿠샤, 문화재가 되다
테일러 부부는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산책하던 중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보고 그곳에 집을 짓고 살기로 했어요. 이 집이 '딜쿠샤'였습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감금됐다가 추방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오려 했던 앨버트 테일러는 1948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을 거뒀고, 아내 메리는 남편 뜻을 따라 유해를 한국 땅에 안장했습니다. 그 뒤 딜쿠샤는 잊히고 방치돼 여러 사람이 무단으로 거주하기도 했어요.
딜쿠샤는 2017년 등록문화재 687호가 됐고, 내년까지 복원 작업이 진행됩니다. 서울시는 다음 달 1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딜쿠샤의 복원 공사 현장을 공개한다고 해요. 서울역사박물관은 테일러가(家)에서 기증받은 자료를 토대로 3월 10일까지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 목걸이'를 열고 있어요.
☞독립운동 도운 외국인들 딜쿠샤에서 만나게 된대요
딜쿠샤의 등록문화재 명칭은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에요.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양식 가정집이었다고 합니다. 2층에는 거실과 응접실이 있었어요. 응접실에선 서울 시가지와 한강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해요.
2006년 테일러 부부의 아들 브루스는 증·개축으로 훼손된 집을 보고 "그저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딜쿠샤는 복원 공사가 끝나면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들을 조명하는 전시관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