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지옥같은 전쟁 겪고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 유언 남겼죠
6·25 영국인 참전용사, 윌리엄 스피크먼
지난 19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어요.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국군과 함께 싸운 영국인 참전 용사 고(故) 윌리엄 스피크먼씨의 장례식이었어요. 국군 의장대와 한국인 참전 용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피크먼씨의 자녀가 지난해 영국에서 숨진 아버지의 유골을 안장했어요.
고인은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는 왜 조국 대신 지옥 같은 전쟁을 겪은 한국에 묻히고 싶어 한 걸까요?
◇한국 편에 선 유엔
스피크먼은 영국 참전 용사 1만4000명 중 한 명이었어요. 그는 6·25가 터지기 전 자원입대해 독일·이탈리아·홍콩 등지에서 복무했어요.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술도 많이 마시고 떠들기 좋아해 군기가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지요.
1951년 11월 4일 지금은 북한 땅이 된 마량산에서 24세 스피크먼 이등병은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어요. 스피크먼이 속한 부대가 마량산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후부터 적군이 격렬한 포격을 퍼부었어요. 스피크먼에게는 그 순간이야말로 '헬조선'이었을 거예요.
중화기 포격은 끔찍스러워요. 폭음으로 귀가 먹먹해지고 땅이 뒤흔들리죠. 참호가 무너질 때 생매장당할 수 있다는 공포, 폭탄 파편에 내장이 갈가리 찢길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어요.
하지만 포격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었어요.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쓰며 밀려왔어요. 인해전술이란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엄청난 규모로 병력을 계속 쏟아붓는 전술입니다.
◇가장 참혹한 전투… 육박전
보병들의 육박전은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예요. 적과 맞부딪칠 때 중간 거리에선 서로 총을 쏩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총 한두 발 맞고 끄떡없는 장면이 나오지만 현실은 달라요. 총알이 살을 관통해 뼈와 내장을 헤집어놓으니까요. 더 근접하면 그때부턴 적군과 서로 얼굴을 보며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죠. 상대의 피가 이쪽 군복을 적시고요.
- ▲ 고(故) 윌리엄 스피크먼씨가 2015년 한국을 방문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있어요. 휠체어에 앉아 분향하는 사람이 스피크먼씨입니다. 그는 당시 “(한국이) 이렇게 훌륭하게 재건되다니, 참전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 한국에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어요. /이덕훈 기자
스피크먼은 원래 후방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하다는 무전을 듣고 상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군복 주머니에 수류탄을 있는 대로 쑤셔넣은 뒤 최전선으로 혼자 달려나갔습니다.
총을 쏘기엔 적이 너무 가까이 사방에 있었습니다. 그는 수류탄을 터트려 문자 그대로 중공군 사이에 길을 뚫으며 나아갔어요. 뒤에 있던 영국군 여섯 명이 용기를 얻어 합세했어요. 스피크먼은 다리와 어깨에 부상을 입고도 폭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밤 깊도록 6시간 이상 계속 싸웠어요. 그러다 일본에 있는 병원에서 깨어난 게 스피크먼의 다음 기억입니다.
◇"싸울 가치가 있는 전쟁이었다"
그는 귀국 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는 빅토리아 철십자훈장을 탔어요. 영국군 최고의 훈장이지요. 영국인 6·25 참전 용사 중 이 훈장을 탄 사람은 단 4명뿐이랍니다.
하지만 전후에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어요. 술을 많이 마셨고, 생활도 어려웠어요. 전역한 뒤 집 수리비를 마련하려고 빅토리아 철십자훈장을 팔아버리기도 했어요.
그는 2000년대 들어 세 차례 한국을 방문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어요. 1950년대의 한국은 절망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새 천년을 맞는 한국은 세계적인 공업국이자 존경받는 민주주의 국가였어요.
스피크먼은 동료 참전 용사에게 '한국을 사랑한다. 6·25는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전쟁이었다'는 편지를 썼어요. 그는 이제 유엔군 참전 용사 885명과 나란히 영원히 잠들었어요. 고인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스피크먼 이등병, 총성은 멎고 당신이 지킨 땅은 자유로워졌어요.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한국에 군대를 보낸 나라들
지금 한국은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 선진국이 됐지만, 1950년 6·25가 터졌을 때는 북한이 국력도 병력도 한국을 앞섰어요.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차 242대를 앞세워 선전포고 없이 남침해오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군을 파견해 한국을 돕기로 결정했어요.
미국·영국·캐나다·터키·호주·필리핀·뉴질랜드·에티오피아·그리스·태국·프랑스·콜롬비아·벨기에·남아공·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16국(참전 병력 순)이 군대를 보내줬어요. 스웨덴·덴마크·인도·노르웨이·이탈리아도 의료 인력을 보내왔답니다. 6·25 전쟁에서 국군은 61만명이 죽거나 다쳤고 유엔군은 6만명이 숨지고 48만명이 다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