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기모노 허리띠에 감춘 2·8 독립선언서, 3·1 운동 도화선 됐죠

입력 : 2019.02.12 03:00

[2·8 독립선언과 여성들]
일본 유학 중이던 김마리아·차경신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운동 조선에 알리고 3·1 운동 준비했어요

1919년 2월 17일, 기모노를 입은 두 여성이 일본 도쿄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어요.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조선 부산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의 허리를 감싸는 오비(帶·띠) 속에는 몰래 숨겨 놓은 것이 있었어요. 만약 발각된다면 당장 감옥으로 끌려갈 문서, 바로 2·8 독립선언서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와 차경신(1892~1978)이었습니다. 김마리아는 도쿄 메지로여자학원, 차경신은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다니던 유학생이었어요.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한다"

이들은 왜 이렇게 위험천만한 귀국을 감행해야 했던 걸까요? 그보다 9일 전에 도쿄 유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2·8 독립운동의 실상을 국내에 전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유학생들은 '적국 수도 한복판'인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어요. 이들의 선언문은 "우리는 자기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 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해 더운 피를 뿌리자"며 강한 독립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뉴스 속의 한국사] 기모노 허리띠에 감춘 2·8 독립선언서, 3·1 운동 도화선 됐죠
/그림=안병현
당시 도쿄의 조선인 남자 유학생은 700~800명이었는데 여자 유학생은 50명 정도였어요. 2·8 독립선언의 서명자로 나선 유학생 대표 11명 중에서 여학생은 없었죠. 하지만 여학생 역시 남학생 못지않은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굳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2·8 직전에 열린 조선인 유학생 웅변대회에서 다들 여학생들에겐 별로 주목하지 않자,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 회원 황에스터(1892~1971)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어요.

"여러분!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겁니까?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못합니다."

2·8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선 여학생들은, 운동을 주도한 남학생들이 모두 체포된 뒤 이 일을 국내에 알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갔다가 풀려난 김마리아가 이 일에 나섰지요. 황해도 출신인 김마리아는 서울 정신여학교 재학 시절 머물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김규식·안창호·이동휘 같은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는 걸 보고 조국애를 키워나갔어요. 도쿄 유학 시절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남녀 구분 사라진 민족운동 전선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얇은 미농지에 열 장 넘게 베끼며 치밀하게 국내 잠입 준비를 했어요. 믿을 만한 동지로 정신여학교 후배인 차경신과 동행하기로 했죠.

김마리아는 서울과 대구, 광주, 황해도로 분주히 움직이며 2·8 독립선언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 준비 작업을 벌였어요. 김마리아가 일본 유학 전 교사로 근무했던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에도 독립선언서를 전달해요. 여학생들은 3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어요. 여학생들은 무장한 일본 기마 헌병대 앞에서도 "우리 발로 경찰서로 가겠다"고 외치는 기개를 보였어요. 이보다 며칠 전 서울에서 체포된 김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당해 평생 뼛속에 고름이 차는 병을 얻었습니다.

김마리아는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고, 투옥과 상하이 망명, 미국 유학, 신사참배 거부의 길을 걸었지요. 안타깝게도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3·1운동은 민족운동 전선에서 남녀의 성(性) 차이를 처음으로 극복한 사건이었고, 이후 유관순 말고도 숱한 여성 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답니다.


[여성 목소리로 쓰인 독립선언서]

"겁나의(오래된)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라." 이것은 100년 전인 1919년 2월 '여성'의 목소리로만 쓰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1291자 분량의 선언문은 일제의 억압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데 여성이 앞장서겠다는 자신감을 드러냈지요.

선언서에 서명한 여성들은 과거처럼 '누구의 처''어머니'로 등장하지 않고 이름 세 글자를 당당히 밝혔어요. '개인'으로 우뚝 선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선에 등장한 것이지요. 이 선언서는 그 뒤 여성 독립운동 단체들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