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일제에 팔려갈 문화재, 집 수백 채 살 돈 써가며 지켜냈죠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展
- ▲ 작품1 - 김정희, ‘예서대련(隸書對聯)’, 1856년, 보물 제1978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설이 며칠 전이었습니다. 집집이 조금씩 다르게 보내지만, 보통 설에는 우리 전통 음식을 실컷 먹게 되지요. 떡국, 생선전, 갈비찜과 잡채까지 한 상 가득 먹고 나면, 후식으로 식혜와 유과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이 많은데, 뭐니 뭐니 해도 두부와 오이 그리고 생강나물이 최고라고 말한 분이 있어요. 바로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랍니다.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대한콜랙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어요. 전시는 3월 말까지 열립니다.
작품1을 보세요.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나물(大烹豆腐瓜薑菜)"이고, "가장 멋진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그리고 손자의 만남(高會夫妻兒女孫)"이라고 씌어 있어요. 추사가 죽음을 두어 달 앞두고 쓴 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받아도 집에서 먹는 반찬처럼 속이 편한 게 없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건 결국 헛되다는 것이죠. 이 글은 내용도 좋지만, 최고 경지에 이른 추사체를 볼 수 있어 더 좋아요. 추사체란 김정희가 옛 중국 한나라 시대 비석을 보고, 그 위에 새겨진 예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한 붓글씨체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각지고 비틀린 느낌이 나는 것 같은데,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 독특한 멋에 감탄하게 된답니다.
이 작품을 수집한 사람 역시 안목이 뛰어났는데, 호는 간송이고 이름은 전형필(1906~1962)이랍니다. 간송은 한국의 전통 미술품을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신념이 강했어요. 그때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지배를 받던 시기였고, 우리 문화재가 경매를 통해 일본에 팔려나가는 형편이었어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간송은 집을 수백 채 살 수 있는 거금을 아낌없이 써서 미술품을 모았죠.
추사의 붓글씨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먼저 살펴볼까요? 작품2와 작품3을 보세요. 하나는 기와집처럼, 또 하나는 오리 인형처럼 생겼는데,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요? 선비가 글을 쓰려면 문방사우(文房四友: 공부방의 네 벗들)가 있어야 해요. 종이·붓·벼루·먹 네 가지죠. 거기에 하나 더 필요한 친구가 연적(硯滴)이에요. 이 기와집과 오리는 둘 다 연적이랍니다. 연적은 벼루의 물이 마를 때마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 다시 먹을 갈 수 있도록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에요.
- ▲ 작품2 -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 19세기. 작품3 - ‘청자오리형연적’, 12세기, 국보 제74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오리 연적은 청자입니다. 청자를 빚고 굽는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12세기 고려 것이라 비취색이 맑고 산뜻하지요. 이 오리는 연못에서 헤엄치다가 연꽃 줄기를 입에 문 모습인데, 등에는 연잎과 연봉오리가 얹혀 있고, 깃털은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오리의 주둥이 쪽을 기울이면 오리가 물을 뿜는 것처럼 물이 떨어졌다고 해요.
- ▲ 작품4 - ‘청자기린유개향로’, 12세기 전기, 국보 제65호. 작품5 - ‘백자박산향로’, 12세기, 보물 제238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작품4도 12세기에 만들어진 청자예요. 이것은 뚜껑 위에 상상의 동물 기린이 붙어 있는 향로(향을 피우는 그릇)입니다. 기린은 뒤로 돌아앉아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향을 피우면 기린이 숨 쉬듯 벌린 입 사이로 연기가 솔솔 나온답니다. 작품5는 백자로 된 향로예요. 알처럼 둥근 형태인데, 뚜껑은 울퉁불퉁한 산봉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구멍이 있고, 옆쪽으로도 6개의 구멍이 산 모양으로 뚫려 있어서 사이사이로 연기가 퍼져 나오면 마치 흰 구름이 산허리에 걸린 듯 보일 거예요.
연적과 향로는 자그마한 물건들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아주 근사한 삶이 스며 있습니다. 이런 고귀한 문화재를 잘 지켜낸 분의 노력이 값지게 느껴지는 전시랍니다.
한글 창제 원리 설명한 '해례본', 간송이 구하지 않았다면…
- ▲ /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사진)도 간송이 없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지 몰라요. 해례본은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간송이 수집한 최고의 우리 문화재 중 하나지요.
간송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요. 소장자는 '큰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받으면 팔겠다'고 했다는데, 간송은 그 말을 듣자 군말 없이 1만원을 내고 해례본을 사들입니다. 기와집 10채 값을 낸 것이죠.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책이에요. 그동안 전해온 훈민정음 언해본은 세종이 아닌 세조 때 펴낸 것으로, 제작 원리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이후 2000년대 들어 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지만 현재 행방을 알기 어렵습니다. 간송이 해례본을 구하지 않았다면 한글 창제 관련 연구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워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