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일제에 팔려갈 문화재, 집 수백 채 살 돈 써가며 지켜냈죠

입력 : 2019.02.09 03:05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展

작품1 - 김정희, ‘예서대련(隸書對聯)’, 1856년, 보물 제1978호.
작품1 - 김정희, ‘예서대련(隸書對聯)’, 1856년, 보물 제1978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설이 며칠 전이었습니다. 집집이 조금씩 다르게 보내지만, 보통 설에는 우리 전통 음식을 실컷 먹게 되지요. 떡국, 생선전, 갈비찜과 잡채까지 한 상 가득 먹고 나면, 후식으로 식혜와 유과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이 많은데, 뭐니 뭐니 해도 두부와 오이 그리고 생강나물이 최고라고 말한 분이 있어요. 바로 조선 후기의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랍니다.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는 '대한콜랙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어요. 전시는 3월 말까지 열립니다.

작품1을 보세요.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나물(大烹豆腐瓜薑菜)"이고, "가장 멋진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그리고 손자의 만남(高會夫妻兒女孫)"이라고 씌어 있어요. 추사가 죽음을 두어 달 앞두고 쓴 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대접을 받아도 집에서 먹는 반찬처럼 속이 편한 게 없고,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건 결국 헛되다는 것이죠. 이 글은 내용도 좋지만, 최고 경지에 이른 추사체를 볼 수 있어 더 좋아요. 추사체란 김정희가 옛 중국 한나라 시대 비석을 보고, 그 위에 새겨진 예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한 붓글씨체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각지고 비틀린 느낌이 나는 것 같은데,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 독특한 멋에 감탄하게 된답니다.

이 작품을 수집한 사람 역시 안목이 뛰어났는데, 호는 간송이고 이름은 전형필(1906~1962)이랍니다. 간송은 한국의 전통 미술품을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신념이 강했어요. 그때는 한국이 일본의 강제 지배를 받던 시기였고, 우리 문화재가 경매를 통해 일본에 팔려나가는 형편이었어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간송은 집을 수백 채 살 수 있는 거금을 아낌없이 써서 미술품을 모았죠.

추사의 붓글씨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먼저 살펴볼까요? 작품2작품3을 보세요. 하나는 기와집처럼, 또 하나는 오리 인형처럼 생겼는데,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요? 선비가 글을 쓰려면 문방사우(文房四友: 공부방의 네 벗들)가 있어야 해요. 종이·붓·벼루·먹 네 가지죠. 거기에 하나 더 필요한 친구가 연적(硯滴)이에요. 이 기와집과 오리는 둘 다 연적이랍니다. 연적은 벼루의 물이 마를 때마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 다시 먹을 갈 수 있도록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에요.

작품2 -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 19세기. 작품3 - ‘청자오리형연적’, 12세기, 국보 제74호.
작품2 -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 19세기. 작품3 - ‘청자오리형연적’, 12세기, 국보 제74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종이와 붓은 다들 비슷하게 생겼고, 먹과 벼루는 장식이 있긴 해도 새까맣기 때문에 개성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연적만큼은 원숭이, 개구리, 복숭아 등 온갖 모양과 색으로 멋을 자랑할 수 있었어요. 기와집 모양의 연적은 백자로 만들었어요. 지붕은 청색이지만, 기둥과 주춧돌은 쇳가루가 섞인 물감으로 그려 갈색 빛을 띠지요. 지붕 끝자락에는 작은 물구멍이 있어서 그쪽으로 기울이면 물이 나오는데, 마치 비 오는 날 추녀(지붕 모서리)에서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답니다.

오리 연적은 청자입니다. 청자를 빚고 굽는 기술이 절정에 달했던 12세기 고려 것이라 비취색이 맑고 산뜻하지요. 이 오리는 연못에서 헤엄치다가 연꽃 줄기를 입에 문 모습인데, 등에는 연잎과 연봉오리가 얹혀 있고, 깃털은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오리의 주둥이 쪽을 기울이면 오리가 물을 뿜는 것처럼 물이 떨어졌다고 해요.
작품4 - ‘청자기린유개향로’, 12세기 전기, 국보 제65호. 작품5 - ‘백자박산향로’, 12세기, 보물 제238호.
작품4 - ‘청자기린유개향로’, 12세기 전기, 국보 제65호. 작품5 - ‘백자박산향로’, 12세기, 보물 제238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대한콜랙숀: 삼일운동100주년 간송특별전’

작품4도 12세기에 만들어진 청자예요. 이것은 뚜껑 위에 상상의 동물 기린이 붙어 있는 향로(향을 피우는 그릇)입니다. 기린은 뒤로 돌아앉아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향을 피우면 기린이 숨 쉬듯 벌린 입 사이로 연기가 솔솔 나온답니다. 작품5는 백자로 된 향로예요. 알처럼 둥근 형태인데, 뚜껑은 울퉁불퉁한 산봉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구멍이 있고, 옆쪽으로도 6개의 구멍이 산 모양으로 뚫려 있어서 사이사이로 연기가 퍼져 나오면 마치 흰 구름이 산허리에 걸린 듯 보일 거예요.

연적과 향로는 자그마한 물건들이지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아주 근사한 삶이 스며 있습니다. 이런 고귀한 문화재를 잘 지켜낸 분의 노력이 값지게 느껴지는 전시랍니다.

한글 창제 원리 설명한 '해례본', 간송이 구하지 않았다면…

'훈민정음 해례본'
/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사진)도 간송이 없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을지 몰라요. 해례본은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간송이 수집한 최고의 우리 문화재 중 하나지요.

간송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요. 소장자는 '큰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받으면 팔겠다'고 했다는데, 간송은 그 말을 듣자 군말 없이 1만원을 내고 해례본을 사들입니다. 기와집 10채 값을 낸 것이죠.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책이에요. 그동안 전해온 훈민정음 언해본은 세종이 아닌 세조 때 펴낸 것으로, 제작 원리에 대한 설명은 없어요.

이후 2000년대 들어 다른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지만 현재 행방을 알기 어렵습니다. 간송이 해례본을 구하지 않았다면 한글 창제 관련 연구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워졌겠죠.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