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신혼여행서도 反戰 메시지… 존 레논 '하나 되는 세계' 꿈꿔
'이매진 존 레논' 展
대중문화의 역사는 비틀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뜻인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비틀스를 이끌었던 주요 멤버였습니다. 그는 극작가 셰익스피어, 물리학자 뉴턴과 나란히 영국을 대표하는 위인의 명단에 올라가 있답니다. 〈사진 1〉은 1965년에 비틀스 모든 멤버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모습입니다. 대중음악인이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던 대단한 사건이었죠.
- ▲ 사진1 - ‘런던 버킹엄 궁전에서 MBE(Memb-ership of British Empire)를 수여받은 비틀스 멤버’, 1965.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 레논’展
레논은 리버풀 미대를 다니다가 데뷔하며 학교를 그만뒀는데 예술적인 몸짓과 표현 방식에 관심이 컸다고 합니다. 가수 생활을 하는 바쁜 일정 중에도 자주 전시장을 찾곤 했어요. 훗날 두 번째 아내가 된 일본 예술가 오노 요코(86)를 처음 만난 장소도 그녀가 작품을 설치한 전시장이었다고 합니다. 레논은 오노가 천장에 붙여놓은 자그마한 무언가가 궁금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거기엔 나무판자가 있었고, 아주 작은 글씨로 '돼요(yes)'라고 쓰여 있었어요.
- ▲ 사진2 - 베드 인 피스(Bed-in Peace)’, 1969.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 레논’展
보통 미술관과 전시장은 '안 돼(no)'뿐입니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만져서도 안 되고, 떠들어서도 안 되고, 음료를 마셔도 안 됩니다. 그런데 오노의 작품은 달랐어요. '돼요'라는 단어는 마치 레논을 기쁘게 맞아주는 느낌을 주었어요. 예술도 사람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그때 처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레논은 오노와 함께 삶 속에서 예술을 실천하기로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 ▲ 사진3 - ‘배기즘(Bagism)’, 1969.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 레논’展
1969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레논과 오노가 호텔 침대 위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광경이 〈사진 2〉에 담겨 있어요. 둘은 헐렁하고 편안한 잠옷 차림을 하고, 머리도 느슨하게 늘어뜨렸어요.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레논의 결혼 소식은 세상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일이었답니다. 신혼부부는 호텔 방에서 기자회견을 갖기로 합니다. 늘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기획하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잔뜩 기대를 품고 찾아왔지요. 그러나 도착해보니 침대 주위에는 꽃이 그득하고, 둘은 그저 하얀 잠옷을 입고 환하게 웃을 뿐이었어요. 그러고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세계평화를 기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구 저편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였거든요. 평화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하려 한 두 사람의 기획은 효과가 단연 최고였어요. '평화'라는 단어와 함께 두 사람의 사진이 전 세계 주요 신문을 도배했어요.
이렇듯 레논은 결혼 후에는 노래보다는 예술 기획에 열심이었어요. 음악과 시, 그림, 어떤 형식이건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사진 3〉은 1969년 4월 1일 만우절에 TV 쇼에 출연한 모습인데요. 오노와 함께 큰 자루에 들어가서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했죠.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만우절 이벤트가 아닌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퍼포먼스였어요.
- ▲ 사진4 - ‘아들 숀 레논과 함께’, 1975.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 레논’展
자루에 담겨 뒤섞인 공은 꺼내보기 전에는 어떤 색깔인지 알 수 없지요. 사람도 인종이나 성별·외모·나이 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고, 모두 뒤섞여 살 수 있는 편견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메시지는 그의 노래 '이매진' 가사에도 나와요. 국가나 종교의 경계와 상관없이 하나처럼 사는 세상을 꿈꾸는 노래지요.
비틀스는 1965년 미국 공연 때 '분리된 청중에 대해서는 연주할 의무가 없음'이라는 문구를 공연계약서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흑인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었던 시절이라 공연장을 백인 전용 구역과 흑인 전용 구역으로 분리해둔 것을 보고 그에 반대한 것이지요. 덕분에 백인과 흑인 구별 없이 모두 한자리에서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답니다.
1970년에 세계인의 우상이었던 비틀스가 정식으로 그룹을 해체하자 일부 팬은 레논이 오노와 결혼했기 때문에 비틀스가 쪼개졌다며 오노를 비난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레논은 오노 덕분에 삶에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두 명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는 것도 두 명이고, 아이를 만드는 것도 두 명이니까요." 〈사진 4〉는 레논이 아빠가 된 모습입니다.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충실하게 살아보기 위해 당분간 모든 외부 활동을 접기도 했어요.
- ▲ 사진5 - ‘10만의 인파가 몰린 뉴욕 센트럴파크’, 1980.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이매진 존 레논’展
5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새로 앨범을 내놓던 1980년 겨울 레논은 난데없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세상을 뜨고 맙니다. 〈사진 5〉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뉴욕 센트럴파크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인데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평화의 승리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레논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평화의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