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 뉴스 따라잡기] 록밴드 '샤우팅'보다 시끄럽지만 막말하면 퇴장

입력 : 2019.01.22 03:09

영국 하원(House of Commons) 의사당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브렉시트'가 3월 29일로 다가왔어요.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뒤 거리에서, 언론에서, 의회에서 격론을 벌여왔어요. 하지만 브렉시트가 겨우 10주 앞으로 다가온 지금도 브렉시트로 인해 불거질 외교적·법적·경제적·상업적인 난제를 어떻게 풀지 명확하게 합의된 분야가 거의 없어요.

여러분은 지난 15일 영국 의회에서 테레사 메이 총리가 들고온 브렉시트 합의안이 부결되는 장면, 이튿날인 16일 메이 총리가 불신임 투표에서 기사회생하는 장면을 봤을 거예요. 최근 수십 년간 이 정도의 정치적 혼란은 없었어요. 영국군은 현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경계(alert)' 상태랍니다.

◇록밴드보다 더 시끄러운 의회

영국 의회는 근대 의회의 모델이라 불려요. 영국보다 먼저 의회가 생긴 나라도 여럿 있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의회민주주의를 다진 건 영국이거든요. 영국 의회는 투표로 뽑는 하원(650명), 임명직이거나 귀족 중에서 뽑힌 상원(785명)으로 이뤄집니다. 상·하원 둘 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있어요. 실권을 쥔 건 하원이죠. 메이 총리 등이 현직 의원들이 녹색 벤치에 다닥다닥 붙어앉아 토론하던 방이 하원 의사당입니다.

이 방은 우선 좁아요. 전체 하원 의원 중 대략 3분의 2(650명 중 427명)가 겨우 앉을 수 있지요. 전체 의원이 모일 때면 나머지 3분의 1은 도리없이 문가에 서야 합니다. 여기는 원래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있는 왕의 예배당이었어요. 예배당 긴의자에서 벤치에 앉는 전통이 나왔지요. 하원 의사당은 1834년 런던 대화재와 1941년 독일군 공습으로 두 차례 잿더미가 됐는데, 그때마다 원래 모습을 최대한 살려 복원됐어요.
영국 하원 의원은 이렇게 앉아요
/AFP 연합뉴스
하원 의사당은 소란스럽습니다. 의원들이 의사일정표를 허공에 흔들기도 하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야유하기도 하죠. 2013년 존 버코 당시 하원의장이 "의원들이 내는 소음이 전성기 때 '딥퍼플'도 못 따라올 수준"이라고 동료 의원들을 꾸짖었을 정도입니다. 딥퍼플은 '샤우팅 창법'으로 유명한 1970년대 영국 록밴드예요.

하원의장은 의사당 정면 의장석에 앉습니다. 의사당이 시끄러워질 때마다 "질서!(Order!)"라고 외치죠. 하원의장의 오른편은 여당, 왼편은 야당입니다. 여당 쪽 맨 앞줄에는 총리를 포함한 현직 각료들이, 야당 쪽 맨 앞줄에는 여당이 무너졌을 때 현재의 내각을 대체할 '섀도 내각' 멤버들이 앉습니다. 이들을 '프론트벤처(frontbenchers)'라고 하고, 그 뒤에 앉는 의원들을 '백벤처(backbenchers)'라고 해요.

하지만 겉보기에 소란할 뿐,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상대를 '거짓말쟁이' '겁쟁이' '주정뱅이' '멍청이' '돼지' 등으로 불러선 안 돼요. 2016년 80대 야당 의원이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의 돈 문제가 깨끗하지 않다며 "수상쩍은(dodgy) 데이비드"라고 했다가, 남은 하루 동안 퇴장당한 일도 있었답니다. 박수 치는 것도 왠지는 모르지만 수백 년째 내려오는 금기입니다.

참고로 여당 의석 맨 앞줄과 야당 의석 맨 앞줄 사이에는 폭 3.96m의 빈 통로가 있어요. '칼 두 자루 거리'죠. 의원끼리 욱해서 칼을 뽑는 상황이 벌어질까 봐 중세부터 내려오는 관행입니다.

처칠이 명연설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1265년 첫 모임 이래 영국 의회에서는 여러 번 역사가 이뤄졌어요. 1833년에는 노예제 폐지법이 통과됐고, 1940년에는 윈스턴 처칠 당시 총리가 독일에 맞서 싸우자고 연설했지요. 영어로 이뤄진 가장 주옥같은 연설 상당수가 이곳에서 나왔어요.

의원들의 토론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하원의장 양쪽에 여야가 대칭되게 앉아 논쟁하는 구도에는 여러 강점이 있어요. 총리와 각료들은 자기네 주장을 '라이브'로 펼쳐보여야 해요. 그러려면 입장이 명확하고,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하죠. 남을 설득하는 기술, 압박을 느낄수록 평정을 유지하는 능력도 있어야 해요. 모두 리더십의 핵심 자질입니다. 유권자들은 의회 토론을 통해 자기네가 뽑은 의원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훤히 볼 수 있어요. 국민이 뽑은 사람이 국민을 대신해 행동하는 '대의 민주주의'이죠.

이런 전통에서 이탈했다는 게 지금 영국이 직면한 브렉시트 문제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겠어요. 2016년 캐머런 당시 총리는 브렉시트를 국민 투표에 부쳤어요. 대중은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했어요.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느냐, 남느냐'는 극도로 복잡한 사안이기 때문에 의원들이 유능한 보좌관들을 동원해 깊이 조사하고 치열하게 토론해서 결정했어야 할 이슈인데, 섣불리 대중이라는 아마추어에게 결정권을 넘겨버린 탓에 지금의 혼란이 벌어졌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새먼 아시아타임스 동북아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