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차 대전 후 배상금에 시달린 독일, 빵값 2000억배 뛰었죠

입력 : 2019.01.18 03:00

[베르사유조약]
승전국들이 막대한 배상금 물리고 자원 풍부한 알자스·로렌 빼앗아
불만 커진 독일 국민은 히틀러 지지… 결국 20년 뒤 2차 세계대전 일어났죠

오는 18일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지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 파리강화회의는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국제회의입니다. 독일과 연합국 측은 다섯 달 넘는 협의 끝에 그해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을 맺습니다. 다시는 참혹한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패전국들을 응징하는 게 이 조약의 핵심 목표였지만, 불과 한 세대 만에 2차 대전이라는 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고 말지요. 베르사유조약이 2차 대전을 막긴커녕 2차 대전의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상자 562만명 낸 프랑스의 '뒤끝'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1년간 계속됐어요. 연합국 측 27국 대표들이 참석했는데요, 그중에서도 프랑스·영국·이탈리아·미국 등 '빅 포(Big Four)' 4국이 회의를 주도했어요. 미국의 윌슨 대통령,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이탈리아의 오를란도 총리죠.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100년 전인 1919년 1월 27국이 파리강화회의를 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100년 전인 1919년 1월 27국이 파리강화회의를 열었습니다. 연합국과 독일이 다섯 달 뒤 베르사유조약을 맺는 모습을 담은 영국 화가 윌리엄 오르펜의 그림입니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 왼쪽에서 다섯째부터 윌슨 미국 대통령,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랍니다. /영국 제국 전쟁 박물관
프랑스가 가장 강경한 태도였어요. 1차 대전에서 프랑스 군인 562만명이 숨지거나 다쳤어요. 러시아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죠. 클레망소 총리는 황폐화된 프랑스를 복구하기 위해 독일이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독일 때문에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받겠다는 거지요.

프랑스는 독일이 군비를 축소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는 자르, 란다우, 알자스·로렌 지방을 돌려달라고 했어요. 이 중 알자스·로렌 지방은 라인강 서쪽의 비옥한 평원일 뿐 아니라 철광석 같은 자연 자원도 풍부했어요. 독일과 프랑스가 모두 탐내는 땅이라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지요. 중세까지 신성로마제국 영토였다가 근세로 넘어오며 프랑스 영토가 됐어요. 1870년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여 다시 프로이센 땅이 됐는데, 약 50년 만에 그 땅을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였어요. 또 자르는 철광석이 풍부하고, 란다우는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과 영국은 입장이 조금 달랐어요. 1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했어요. 미국과 영국은 사회주의 사상이 소련을 넘어 유럽 전체로 퍼지길 바라지 않았어요.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걸 막으려면, 독일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되는 게 좋다고 판단했지요.

독일이 너무 약해져서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너무 강해지는 것도 미국과 영국은 원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깨지니까요.

결국 프랑스는 자르와 란다우는 빼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돌려받는 데 만족해야 했어요. 프랑스 국민은 독일을 너무 봐줬다며 반발했어요. 조약에 서명한 클레망소 총리에게 "뭘 하고 있었느냐"는 비판이 쏟아졌지요.

참고로 베르사유조약을 맺은 곳은 베르사유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이에요.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굴복시킨 뒤 바로 이 방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했어요. 프랑스는 50년 가까이 잊지 않고 있다가, 같은 방에서 독일을 굴복시키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굴욕을 되갚았어요.

◇독일에 과연 관대한 조약이었을까?

그런데 베르사유조약은 정말로 프랑스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독일에 관대한 조약이었을까요? 수많은 학자가 "베르사유조약은 가혹하고 징벌적인 강화조약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독일은 1차 대전으로 인구의 10%를 잃었어요. 전후엔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 15%를 다시 잃었죠. 알자스·로렌 지방뿐 아니라 독일 동부의 다른 분쟁 지역과 해외 식민지에 관한 권리도 연합국에 넘겨야 했죠. 징병 제도는 폐지됐고, 병력도 육군 10만, 해군 1만 5000명으로 제한됐어요.

막대한 배상금도 물었어요. 당시 독일의 한 해 세입은 60억~70억마르크로 추정되는데, 1921년 결정된 배상 총액은 1320억마르크에 달했어요. 독일 국민이 낸 세금을 한 푼도 안 쓰고 22년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액수였지요.

결국 독일은 화폐를 마구 찍어댔어요. 이건 극심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지요. 1918년에는 빵 한 덩이에 0.5마르크였는데 5년 뒤인 1923년에는 1000억마르크가 됐어요. 경제가 피폐해지고 원래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다고 생각해 분노한 독일 국민은 "독일의 영광을 되찾자"고 외치는 히틀러를 지지하기 시작했어요.

1차 대전은 그 당시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어요. 그래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The War That Will End War)'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이 전쟁 이후로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뜻이었지요.

하지만 파리강화회의는 평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조약 체결 20년 만인 1939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중단하고 2차 대전을 시작했으니까요.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은 국제정치에서 정답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평화로 가는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는 사례예요.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