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英 에드워드 8세, 유부녀와의 사랑 위해 왕위 포기했대요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
- ▲ 말레이시아 국왕 무하맛 5세(왼쪽)는 러시아 모델과 결혼하고 최근 왕위를 내려놨어요. /트위터
무하맛 5세는 지난해 11월 병가를 내고 러시아 출신 모델과 결혼했어요. 국왕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와 물러났다는 추측이 나옵니다. 세기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영국에서도 비슷한 로맨스가 있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8세(1894~1972)와 월리스 심프슨(1896~1986) 부인이 주인공이죠.
◇바람둥이, 임자를 만나다
에드워드 8세는 영국 국왕 조지 5세(1865~1936)의 장남이에요. 잘생긴 외모에 탁월한 패션 센스로 선망의 대상이었죠. 파티를 즐기는 바람둥이로도 유명했어요.
그랬던 에드워드 8세에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옵니다. 한 파티에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미국인 심프슨 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해요. 당시 심프슨 부인은 이혼 경력이 있는 유부녀였어요. 두 번째 남편과 아직 살고 있었죠.
영국 왕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왕가와 격이 맞아야 할 텐데, 심프슨 부인은 외국인 평민인 데다 아직 결혼 상태라, 에드워드 8세의 신부가 되려면 재혼한 남편과 한 번 더 이혼해야 했어요.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인 메리 왕비는 심프슨 부인을 '그 여자'(That Woman)라고 부르며 못마땅해했대요.
◇"사랑하는 여인 없이는 국정 불가능"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지병으로 눈을 감자, 에드워드 8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새 왕이 본격적으로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추진하자, 대다수 국민과 언론은 거부감을 느꼈어요. 스탠리 볼드윈 당시 영국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거론하며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어요.
- ▲ 에드워드 8세(오른쪽)와 월리스 심프슨 부인이 1937년 프랑스에서 결혼식 직후 찍은 사진입니다. 영국 왕가에서는 결혼식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결혼을 강행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에드워드 8세는 결국 즉위한 지 11개월째인 1936년 12월, 동생 앨버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라디오 연설을 합니다. "무거운 책임을 맡는 일도, 왕으로서 원하는 바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일도,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그의 연설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어요. '사랑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죠. 에드워드 8세는 퇴위 후 '윈저 공작(Duke of Windsor)'이라는 작위를 받았어요. 그는 이듬해 심프슨 부인과 프랑스에서 결혼했어요. 왕실 사람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심프슨 부인은 어떤 작위도 받지 못했어요. 왕실은 그녀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거예요.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한 것이 영국과 세계에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에드워드 8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앨버트 왕자가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랍니다. 형처럼 잘생기지 못한 데다 말도 더듬었지만, 2차대전으로 영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됐을 때 말 더듬을 극복하고 느리고 굳센 말투로 국민을 북돋는 연설을 해서 나라의 힘을 한데 모은 인물이지요.
반면 에드워드 8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독일에 온정적이었고, 히틀러를 높게 평가했어요. 독일이 재무장에 나선 상황에서 '독일과 친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죠. 그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심프슨 부인과 함께 1937년 독일에 가서 히틀러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어요.
영국 왕실은 윈저공이 나치와 가깝게 지내는 걸 불안하게 지켜봤어요. 2차대전이 터지자, 영국 정부는 윈저공을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서인도제도의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윈저공은 전후에 여러 나라를 떠돌다 프랑스에서 별세했어요. 그의 시신은 영국 왕실 묘지에 안치됐어요. 심프슨 부인도 훗날 곁에 묻혔지요. 윈저공은 죽은 이후에야 사랑하는 이와 고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거예요.
☞윈저 패션
에드워드 8세는 미남이지만 키는 비교적 작았어요. 미국 배우 톰 크루즈보다 2㎝ 작은 168㎝였죠. 그는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패션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해요. 그 결과 20세기 남성의 패션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오늘날 격식 있는 정장 스타일을 '윈저 패션'이라고 하거나, 큰 매듭의 좌우대칭을 갖춘 타이 매듭을 '윈저 노트(knot)'라고 부르는 것도 에드워드 8세가 퇴위 후에 받은 작위 '윈저공'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다만 윈저공 자신은 꼭 기쁘지 않았나봐요. 그의 회고록에 윈저 노트를 가리켜 "그 볼품없는 매듭은 내가 고안한게 아니었다"고 쓴 대목이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