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고종, 美 대통령 딸 앨리스에 매달렸지만 나라 뺏겼죠

입력 : 2019.01.09 03:00

[미국 공주 방한]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딸 방한
고종, 美가 日 침략 견제할 거라 믿어 황실 가마·고급 숙소 등 극진히 대접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예전엔 '구한말'이라 부르던 대한제국 시대가 최근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덕수궁 미술관에 가면 이 당시의 미술만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지요.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을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군주'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아요.

분명 고종이 국권 회복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공적이진 못했어요. 지금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한 사건이 1905년 을사늑약 직전에 일어났답니다. '미국 공주 방한 사건'이었어요.

미국 대통령 딸을 황실 가마로 모시다

여러분은 미국 대통령 중에 '루스벨트'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20세기 전반기에 두 사람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있었어요.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년)와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1945년) 대통령이죠. 두 사람은 뉴욕 명문 루스벨트 가문 출신으로, 6대조가 같은 12촌 관계랍니다.

[뉴스 속의 한국사] 고종, 美 대통령 딸 앨리스에 매달렸지만 나라 뺏겼죠
/그림=안병현
이중 나중에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카이로회담 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인물이지요. 하지만 둘 중 먼저 집권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와 정반대 대한(對韓) 정책을 펼쳤어요. 그걸 모른 건 고종과 대한제국뿐이었지요.

1905년 9월 19일 축구장 두 개 길이의 거대한 증기선 만추리아호가 인천항에 도착했어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파견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사절단이 타고 있었지요. 훗날 27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장관이 단장이었어요. 일행 중엔 당시 21세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1884~1980)도 있었지요.

"미국 대통령의 딸이라고? 그렇다면 공주(公主)로군!" 고종 황제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앨리스 공주'를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황실 악단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앨리스가 화려한 황실 가마를 타고 입궁해 덕수궁 안에 있던 대한제국 최고급 숙소 돈덕전에 묵었어요. 앨리스가 한국을 떠나는 날에는 여러 대신이 서울역까지 나와 전송했습니다.

밀약도 모른 채 '미국이 도와주겠지'

고종이 앨리스 루스벨트를 이렇게 환대한 건, 그만큼 대한제국이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에요. 앨리스가 방한하기 보름 전에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방파제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이때 대한제국이 마지막 희망을 건 나라가 미국이에요. 1882년 조선과 미국은 '타국의 위협에 서로 힘을 합쳐 대응한다'는 내용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어요. 그러니 '미국이 일본을 견제해 주지 않을까' 기대한 거죠.

하지만 고종과 대한제국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어요. 사절단은 한국에 오기 두 달 전인 7월 일본에 먼저 들렀어요. 이때 태프트 단장은 가쓰라 다로(桂太郞) 당시 일본 총리와 만나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에 동의한다'는 밀약에 서명했어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통령이던 1900년 친구에게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기 바란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답니다.

그의 딸 앨리스는 자신을 환대하는 고종이 안됐던지 훗날 이렇게 회고했어요. "환송 회견장에서 황제와 황태자(훗날 순종)는 자신들 사진을 내게 줬다. 그들은 황제다운 존재감이 거의 없었으며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강대국의 거대한 체스 게임에서 이미 대한제국은 '버려진 말'이었던 거예요.

황제의 슬픈 눈빛 속 '냉혹한 국제관계'

고종이 앨리스에게 선물한 이 사진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 새클러 갤러리에 있고, 사절단이 선물로 가졌던 또 다른 사진이 2015년 미국 뉴어크박물관에서 발견됐어요. 황실 사진가였던 해강 김규진이 촬영한 것입니다. 지금 덕수궁 미술관에서 이 사진을 볼 수 있어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명전 1층 복도에서 황제의 옷인 황룡포를 입은 채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는 고종의 눈빛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미국 사절단 방문 두 달 뒤인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본과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당했어요. 더 이상 외국의 사절단이 찾아올 일도 없게 됐지요. 앨리스는 이듬해 결혼했고, 96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워싱턴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다고 합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