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바흐는 연주자들의 교본… 파가니니는 기교 뽐내는 곡 남겨

입력 : 2019.01.05 03:05

무반주 바이올린의 대가들

바흐
바흐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입시생들, 특히 예체능 계열의 수험생들에게 1월은 실기 시험을 치르는 치열한 기간이죠. 모두 꾸준히 연마해 온 기량을 시험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길 바랍니다.

미대 지망생은 데생(소묘)을 할 때 로마제국 장군인 아그리파의 얼굴상을 꼭 그리죠. 음악 실기에서도 아그리파처럼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어요. 특히 바이올린 전공생은 시험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거치게 돼요. 모두 여섯 곡인 이 시리즈는 느림-빠름-느림-빠름의 네 악장으로 구성된 소나타 세 곡, 소나타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모음곡인 파르티타 세 곡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독일 작곡가 바흐는 거의 모든 장르의 작품을 남겼는데요, 그가 독일 쾨텐에서 활동하던 1720년경 작곡한 이 곡은 당시에 매우 독특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바로크 시대 음악은 첼로와 오르간 등의 반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반주 없이 바이올린 혼자 연주한다는 것이 특징이거든요.

이 작품의 위대함은 바이올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한다는 점이에요. 바이올린 전공 학생은 평생 이 곡을 연주하게 된다고 하는데 연주자의 실력과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곡이라고 해요. 바이올린 여제(女帝)로 불리는 힐러리 한(Hahn·40)은 인터뷰에서 매일 습관적으로 이 곡을 연습한다고 밝혔다고 해요. 힐러리 한은 지난달 한국을 찾아 독주회를 했는데 여기서도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연주했죠.

바흐는 다성음악(둘 이상의 선율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음악)을 많이 만들었어요. 이 작품에서는 줄이 넷뿐인 바이올린으로도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어요. 소나타 세 곡에 들어 있는 푸가 악장이 좋은 예입니다. 또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등 다양한 종류의 춤곡이 등장하는 파르티타에서는 흥겨운 리듬과 변화무쌍한 악상을 보여줘요. 바이올린 혼자 연주하고 있음에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죠. 가장 잘 알려진 곡은 파르티타 2번 d 단조 중 마지막 악장인 '샤콘느'예요. 장대한 변주곡 형식으로, 반복되는 화성 속에서 바이올린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치는 걸작이죠.

바이올린 여제(女帝)로 불리는 힐러리 한은 아홉 살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연주했대요. 바흐는 이 작품을 1720년 작곡했어요. 반주 없이 바이올린만으로 변화무쌍한 음악을 보여주는 걸작이에요.
바이올린 여제(女帝)로 불리는 힐러리 한은 아홉 살 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연주했대요. 바흐는 이 작품을 1720년 작곡했어요. 반주 없이 바이올린만으로 변화무쌍한 음악을 보여주는 걸작이에요. /마스트미디어

바흐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지만 역시 시험이나 콩쿠르에 자주 등장하는 곡이 있어요.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가 작곡한 24개의 카프리스 작품입니다. 카프리스는 이탈리아어로 '변덕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짧지만 개성이 풍부하고 자유로운 구성을 갖춘 이 무반주 바이올린 곡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에요. 어려운 바이올린 기교는 모두 모아둔 것 같은 이 곡은 저마다 다른 기교가 필요한데, 난도가 정말 높아서 제아무리 능숙한 연주자라도 늘 도전하는 듯한 느낌으로 연주하게 되죠. 24곡 중 마지막 24번은 주제와 변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상적인 멜로디와 곡예와 같은 기교로 영화 음악 등을 통해 많이 알려졌습니다.

파가니니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음악가'라 불렸어요.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무대 매너는 늘 화제였어요. 어느 날 그가 열정적으로 연주하는데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어요. 그는 끊어진 줄을 그대로 둔 채 세 줄만으로 연주를 이어갔죠. 하지만 이어서 또 다른 줄이 끊어졌어요. 파가니니는 아예 남은 두 개의 줄 중 하나를 일부러 끊어버리고는 한 줄만으로 연주를 마쳤다고 해요.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파가니니가 지녔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능력을 설명하는 에피소드입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곡에서 영감을 얻어 바이올린 무반주 소나타를 만든 작곡가도 있어요. 벨기에의 작곡가 외젠 이자이(1858~1931)입니다. 그는 1923년 여섯 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27을 만들어요. 작품 구성은 네 개의 악장으로 된 곡부터 단악장 곡까지 다양하고, 바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나타낸 1번과 2번, 스페인풍의 하바네라 춤곡을 바이올린 독주로 묘사한 6번까지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복잡한 기교와 난해한 화성, 거기에 바로크 시대의 스타일을 함께 담아내야 하는 어려운 곡이라서 바흐와 파가니니의 작품만큼이나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이 시대를 앞서간 작품으로 평가받고 후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흐가 과거에 유행했던 춤곡들과 여러 음악 형식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작곡했기 때문이에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해를 맞아 지금까지 내가 이뤄놓은 것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주변의 여러 요소를 다시 한 번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흐가 남긴 무반주 첼로 모음곡

바흐는 여섯 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남겼어요. 반주 악기로 쓰였던 첼로를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작품입니다. 당당한 기교와 아름다운 멜로디, 종교적 경건함까지 담아 첼로 연주자라면 꼭 거치는 곡이죠. 바이올린 곡과 비슷하게 1720년경 만들어졌어요.

다만 이 곡들이 널리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요. 스페인의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1876~1973)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죠. 카살스는 모음곡이 "폭넓고 시적인 광휘로 가득 차 있다"고 했대요. 특히 1번 곡은 국내 TV 광고에 자주 나와 들어보면 '이거구나' 할 거예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