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1419년엔 태종이 조선 괴롭히던 대마도 왜구 혼내줬죠
입력 : 2019.01.02 03:00
[역사 속 기해년(己亥年)]
올해는 황금돼지해 '기해년'이에요
1659년 상복 몇 년 입을지 두고 대립, 1839년엔 천주교도들 탄압하기도
올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이에요. 우리나라는 그해 이름에 역사적으로 벌어진 중요한 사건 이름을 붙일 때가 있었어요. 1453년 계유년에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 1592년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온 임진왜란, 1905년 을사년에 일본의 강압에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기로 하며 맺은 을사조약처럼요. 그렇다면 기해년에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을까요?
◇대마도 왜구를 정벌한 기해동정
"이렇게 왜구들의 침략을 받느니 차라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낫다."
1419년 5월 일본 대마도 왜구들이 수십 척의 배를 이끌고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 해안 마을에 나타나 노략질을 했어요. 이 과정에서 조선의 병선을 불태우고 군사들을 죽이기도 했지요. 이에 상왕(上王) 태종은 세종과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벌인 끝에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을 했지요. 태종은 이미 1418년 8월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어요. 그렇지만 군사에 관한 결정권인 병권은 그때까지 쥐고 있었어요. 태종은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한 뒤에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어요.
◇대마도 왜구를 정벌한 기해동정
"이렇게 왜구들의 침략을 받느니 차라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이 낫다."
1419년 5월 일본 대마도 왜구들이 수십 척의 배를 이끌고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 해안 마을에 나타나 노략질을 했어요. 이 과정에서 조선의 병선을 불태우고 군사들을 죽이기도 했지요. 이에 상왕(上王) 태종은 세종과 대신들을 불러 회의를 벌인 끝에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을 했지요. 태종은 이미 1418년 8월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어요. 그렇지만 군사에 관한 결정권인 병권은 그때까지 쥐고 있었어요. 태종은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한 뒤에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어요.
- ▲ /그림=안병현
◇예법 놓고 벌어진 기해예송
"3년 동안 상복을 입으셔야 합니다." "아닙니다. 1년 동안만 입으시면 됩니다."
1659년 5월 조선 17대 왕 효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현종이 임금이 됐어요. 당시 조정은 인조반정의 중심 세력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과 인조반정 이후 등용된 남인으로 갈라져 대립을 벌이고 있었어요. 두 당파는 효종의 죽음을 두고 인조의 두 번째 왕비였던 자의대비(효종의 계모)가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맞섰죠.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이 왕위를 잇기는 했지만 둘째 아들이어서 상복을 1년만 입어도 된다고 주장했어요. 허목과 윤휴 등 남인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여 첫째 아들과 다름이 없으니 상복을 3년 입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처럼 궁중의례나 예법에 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예송(禮訟)'이라고 해요. 기해년인 1659년에 서인과 남인이 상복 입는 문제로 대립을 벌인 것을 기해예송이라 부르지요.
기해예송 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자의대비는 상복을 1년만 입었어요. 서인은 기세가 올랐죠. 그러나 예송 논쟁은 15년 뒤인 1674년에 다시 일어나는데 이때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요.
예송 논쟁은 예법을 두고 벌어졌지만 실제로는 서인과 남인의 권력 대결이었어요. 신하의 권한을 강하게 하여 신하 중심의 정치를 펴려는 서인과 왕의 권한을 중시하는 남인의 정치적 입장이 달랐어요.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벌어져요. 서양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조선 천주교도 100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죠. 그런데 이는 '종교'를 빌미로 한 정계 권력 싸움 성격이 컸대요. 안동 김씨를 무너트리기 위해 풍양 조씨가 주도했다는 지적이죠.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상대적으로 관대했거든요. 당시 살기 어려웠던 일부 백성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주교에 기대를 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정치권은 이마저도 권력을 얻기 위해 활용한 거죠.
◇기해년 역사적 사건을 거울삼아
기해동정 후 왜구들의 노략질은 거의 사라지고 대마도와 일본 각지의 주민들이 약탈보다 평화적인 교류로 조선에 왕래하게 됐어요. 대마도 정벌은 국력과 외교력이 바탕이 돼 외세의 침입을 막아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안겨줬어요.
반면 기해예송은 정치 집단이 나라 발전과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사건이에요. 정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적 혼란이 생긴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기해박해도 마찬가지 사건이고요.
기해년에 조선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백성의 삶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소통과 화합의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