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전쟁서 오른팔 잃은 피아니스트에 '왼손 연주곡' 써줬죠
제1차 세계대전과 작곡가들
- ▲ 드뷔시, 그라나도스, 라벨
어느새 2018년과도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네요. 올해는 20세기 초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지난 11월 11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파리 개선문 앞에 모여 종전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지요.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전쟁 없이 함께 번영하자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는 자리였어요.
전쟁은 그것을 겪는 사람들의 영혼과 정서에 크나큰 흉터를 남기죠.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은 각각의 이유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올해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일군이 파리를 향해 포격을 시작한 직후인 1918년 3월 25일 세상을 떠났어요.
드뷔시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독자적인 아이디어와 참신한 멜로디, 기발한 화성 등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때 참전을 생각할 만큼 애국심에 불탔던 드뷔시였지만, 이미 큰 병을 앓고 있어 입대하기 어려웠어요. 대신 그는 음악으로 자신의 애국심을 표현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는 여섯 곡으로 된 실내악곡을 준비해 한 곡씩 써 내려갔습니다. 적국인 독일 작곡가들이 선호하던 형식과 차별되는 소나타를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이었죠.
그가 계획한 작품들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플루트, 하프, 클라리넷, 오보에,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들을 위한 실내악이었는데요, 병으로 인해 구상했던 여섯 곡 중 첼로 소나타, 플루트·비올라와 하프를 위한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등 세 곡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가 남긴 세 곡의 소나타는 간결한 구성과 세련된 음향, 개성 넘치는 악상으로 즐겨 연주되고 있습니다.
1차대전 중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작곡가도 있어요. 스페인의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입니다. 1차 대전 당시 그가 타고 있던 여객선 '서식스'호가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가던 중 독일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격침된 거예요.
카탈루냐 태생인 그라나도스는 파리에서 공부한 후 1889년부터 바르셀로나에 살면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어요. 그의 대표작은 모음곡 '고예스카스'(1911)입니다. '고야 풍으로'라는 뜻의 스페인어인데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곡들이에요. 일곱 개의 피아노 모음곡으로 만들어져 있죠. 이 곡은 아주 인기가 많아 1914년 오페라로도 만들어졌어요.
- ▲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오페라 ‘고예스카스’의 한 장면. 그라나도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던 길에 타고 있던 배가 독일 잠수함에 공격당해 목숨을 잃어요. /위키피디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전쟁에 참전했어요. 처음에는 파일럿이 되고자 했지만 왜소한 체격 때문에 운전병이 됐어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군 생활을 하면서 치열했던 '베르됭 전투'에도 참여했어요.
그는 제대 후 마지막 피아노 모음곡인 '쿠프랭의 무덤'을 완성해요. 18세기 초 프랑스의 대가였던 프랑수아 쿠프랭의 이름을 딴 여섯 곡의 모음곡이죠. 전쟁 당시 세상을 떠난 지인들에게 바치는 작품이었어요. 전주곡, 푸가, 포를란, 리고동, 미뉴에트, 토카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여섯 곡에는 어린 시절의 친구, 음악 동료, 전쟁 중 만났던 전우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요.
라벨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연주자를 위해 음악을 만들기도 했어요, 폴란드에서 벌어진 전투에 나갔다가 부상으로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왼손을 위한 협주곡'(1930)을 작곡한 거죠. 왼팔뿐인 피아니스트를 위한, 한 손으로 칠 수 있는 곡이에요. 이 곡은 왼손만으로 연주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아노 부분이 화려하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변화무쌍해서 지금까지도 사랑받습니다.
절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술을 지켜냈던 음악가들의 노력이 존경스럽네요. 시련을 뚫고 피어난 작품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 감동적입니다.
[적국의 작곡가를 존경했던 라벨]
라벨은 '왈츠의 왕'이라고 불리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작품들을 무척 좋아했어요. 라벨은 1914년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오마주(Homage) 하는 교향시를 구상했어요. 오마주는 ‘존경’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존경의 뜻으로 다른 작품의 핵심 요소나 표현방식을 따오는 것을 뜻하죠.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라벨은 그 작품을 완성하지 못했어요.
아쉬움을 품고 있던 라벨은 그 후 구상을 바꿔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는 관현악곡 '라 발스'(1920)를 발표해요. 흥겨움과 신비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이 곡은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수도 빈 궁정의 즐거운 무도회장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적국이었지만 예술에는 국경이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