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브렉시트 혼란에 빠진 英, 아일랜드 때문에 머리 아프대요

입력 : 2018.12.14 03:07

둘로 나뉜 아일랜드섬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탈퇴하기로 한 영국이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어요. 영국 옆에는 또 다른 섬나라 아일랜드가 있어요. 아일랜드는 독립국이지만, 아일랜드 북쪽에 있는 '북아일랜드'(1만4130㎢)는 영국 땅이에요. 하나의 섬에 아일랜드와 영국(북아일랜드)이 공존하는 것이죠.

아일랜드는 영국과 달리 유럽연합에 남을 계획이에요. 하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이라 유럽연합에서 빠지게 돼요. 이제까지는 다 같은 유럽연합 회원국이라 왕래가 자유로웠지만 앞으로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할지 몰라요.

아일랜드 섬 전체는 우리나라 남한보다 조금 작아요. 그중 북아일랜드는 강원도보다 조금 작고요. 아일랜드는 어쩌다가 둘로 나뉘게 된 걸까요.

◇잉글랜드, 아일랜드를 침략하다

아일랜드는 12세기 후반부터 이웃 나라 영국(당시 잉글랜드)의 침략을 받았어요. 1542년에는 영국 국왕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완전히 정복했고요. 이후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됐어요. 그때 영국 사람들이 건너가 정착한 땅이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이에요.
북아일랜드의 킬린 지역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우는 데 반대한다’는 내용의 대형 포스터가 서 있어요.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영국의 일부인 북아일랜드도 따라서 EU에서 빠지게 됐는데, 아일랜드는 EU에 그대로 남죠.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할지 모를 상황이 된 것이에요.
북아일랜드의 킬린 지역에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우는 데 반대한다’는 내용의 대형 포스터가 서 있어요.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영국의 일부인 북아일랜드도 따라서 EU에서 빠지게 됐는데, 아일랜드는 EU에 그대로 남죠.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할지 모를 상황이 된 것이에요. /블룸버그

두 나라는 민족도 종교도 달라요. 영국은 개신교를 믿는 앵글로색슨족이 주축이고, 아일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켈트족이 주축이에요. 영국은 아일랜드를 점령한 뒤 토착민의 땅을 빼앗아 새롭게 아일랜드에 건너온 영국인들에게 나눠줬어요. 아일랜드 사람 대다수가 영국인 지주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이 됐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일랜드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감자에 기댔어요. 당시 유럽에서 감자는 생김새가 괴상한 데다 땅 위가 아닌 땅속에서 자란다는 이유로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어요. 그래도 영양가가 높은 데다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19세기 초엽에는 아일랜드 사람 40%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어요. 바로 이때 '감자 기근'이 닥쳤어요. 1840년대 '감자마름병'이 돌아, 멀쩡하던 감자가 죄 썩어버린 거예요.

◇100만명이 굶어 죽은 '감자 기근'

엎친 데 덮쳐 폭설과 한파까지 닥쳤어요. 끼니도 잇기 힘들었던 아일랜드 사람은 겨울을 나기 어려웠어요. 아일랜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영국 정부는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어요. 1845~1849년까지 4년간 아일랜드에서 1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125만명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도 비슷한 수가 해외로 이민을 떠났지요. 아일랜드 전체로 보면 대략 인구의 20~25%가 이 시기에 숨지거나 고향을 등졌다고 해요. 오늘날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계 미국인 상당수가 이때 건너간 사람들의 후손이지요.

기근이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국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됐어요. 이후 독립운동이 격하게 일어납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대대적인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아일랜드는 1차 대전이 끝난 뒤 독립했지만, '절반의 독립'에 불과했어요. 아일랜드 섬(8만4421㎢) 중 83%에 해당하는 지역만 독립국이 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 땅으로 남았거든요.

◇비무장 시민에게 총을 쏜 피의 일요일

북아일랜드에서는 이후 20세기 내내 수많은 유혈 사태가 일어났어요. 북아일랜드 사람들 가운데 가톨릭을 믿는 토착민들은 영국 통치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에 통합되고 싶어했어요. 개신교를 믿는 영국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았고요. 1960년대 말 대대적인 저항 운동에 불이 붙었어요. 이후 약 30년 동안 총격 사건이 3만6900건, 폭탄 테러가 1만6200건 났다고 해요. 그에 휘말려 3254명이 죽고 5만명이 다쳤어요.

대표적인 유혈 사태가 '피의 일요일' 사건이에요. 1972년 북아일랜드 포일 강변에 있는 런던데리라는 도시에서 아일랜드 토착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어요. 무장을 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했어요. 그해 1월 30일,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해 14명이 죽었어요. 영국 정부는 "시위대 중에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집에서 폭발물이 나왔다"며 공수부대를 감쌌어요. 이 일로 전 세계가 영국 정부를 비판했어요.

2010년 영국 정부는 12년에 걸친 조사 끝에 "피의 일요일 사건은 잘못"이라고 인정했어요.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의회에 조사 결과를 보고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피의 일요일에 일어난 일은 정당하지 않았고,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북아일랜드 여러 정파는 1998년 벨파스트에 모여 분쟁을 종식하자는 데 합의했어요.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 포기하고, 영국도 '북아일랜드가 일단은 영국 땅으로 남아 있되, 투표를 해서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에 통합되기로 결정하면 막지 않겠다'고 양보했어요. 그 뒤 분쟁이 소강상태였는데, 영국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국경을 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문제가 떠오르는 상황입니다.


안영우·명덕고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