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뉴스 따라잡기] 28년 만에 즉위하는 日 왕세자, 60년째 기다리는 英 왕세자

입력 : 2018.12.11 03:00

[입헌군주제]
내년 5월 나루히토 왕세자 왕위 올라
찰스는 역사상 최장 기간 자리 지켜

지난 8일 일본 국회가 새로운 일왕이 즉위하는 내년 5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했어요. 안 그래도 4월 말~5월 초에는 '쇼와의 날(히로히토 일왕 생일)', 어린이날, 헌법기념일 같은 공휴일이 촘촘하게 몰려 있는데, 내년에는 일왕 즉위식 날까지 합쳐서 4월 27일~5월 6일까지 열흘간 휴일이 이어진대요. 원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게 원칙이지만, 아키히토(85) 일왕이 "왕실 관련 업무가 많은데 고령이라 힘들다"고 호소해, 큰아들 나루히토(58)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거예요.

일왕이 바뀌면서 새삼 영국 왕실에도 관심이 몰리고 있어요. 엘리자베스(92) 여왕이 정정한데, 아들 찰스(70) 왕세자는 언제쯤 왕관을 물려받을까 하는 점이죠.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는 내년 왕위에 오릅니다.
일본 나루히토 왕세자는 내년 왕위에 오릅니다. 28년 만이죠. /일본 궁내청
찰스는 열 살 때 이 자리에 책봉된 뒤,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60년간 왕세자로 봉직하고 있어요. 31세에 왕세자가 된 뒤 28년 만에 왕위에 오르는 나루히토 왕세자에 견주면, 찰스 쪽이 '왕세자로 지낸 기간'이 두 배가 넘지요.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일본도 영국도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입헌군주제'인데 왜 이렇게 관심이 뜨거운 걸까요?

영국의 경우, 지난 5월 전 세계 시청자 20억명이 잘생긴 해리 왕손이 멋진 미국 여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식 올리는 장면을 지켜봤어요. 근위병이 행진하고, 마차가 굴러가고, 왕실 여성들이 재미난 모자를 쓰고 나타나는 장면이 하나하나 화제가 됐죠. 20억명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관객이나 대형 스포츠 경기 관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열기예요.

사실 두 나라 모두 소수긴 하지만 군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군주들이 불공평한 특권을 누리고 공공의 돈을 낭비한다는 이유죠. 첫째 이유는 일리가 있지만, 둘째 이유는 꼭 그렇지도 않아요. 왕족들이 (자신들이 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사회에 벌어주거든요.

영국 왕실은 각종 자선 단체와 예술 단체, 국가기관을 위해 기금을 모아요. 록스타나 스포츠 영웅처럼 유명한 사람들도 왕실이 주는 상이라면 기꺼이 받고 싶어 하지요. 왕족들은 외교적으로도 굉장한 자산이에요. 영국 여왕과 마주하는 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는 것만큼이나 세계 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에서 탐나는 기회거든요.

왕실과 관련된 관광 산업과 상품도 거대한 비즈니스예요. 왕실은 영국이라는 국가 브랜드의 대들보로서, 막대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어요.

찰스(맨 왼쪽) 왕세자가 2015년 영연방 국가인 뉴질랜드를 방문해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어요.
찰스(맨 왼쪽) 왕세자가 2015년 영연방 국가인 뉴질랜드를 방문해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어요. 찰스 왕세자는 1958년 왕세자가 된 이후 60년째 왕관을 물려받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영국 역사상 최장 기간이죠. /위키피디아
왕세자로 지낸 기간이 60년이나 되니, 아무도 찰스 왕세자더러 '준비되지 않은 왕세자'라고는 말하지 못할 거예요. 지금도 이미 찰스 왕세자는 여왕과 같은 업무를 보고 있어요. 자선 사업과 각종 공식 행사 참석이죠. 환경 문제나 다문화주의처럼 21세기 들어 떠오른 이슈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어요. 찰스 왕세자에게는 왕위에 오른다는 게 단지 머리에 쓰는 왕관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뿐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우디아라비아나 태국처럼 왕이 실권을 가진 군주국에선 종종 왕의 역할이 논란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나 영국, 북유럽, 서유럽 군주국은 입헌군주국이라 군주가 사회에 보탬이 될 때가 많아요. 왕족이 잘하면, 어떤 국가가 추구하는 긍정적인 가치를 몸으로 보여주는 존재가 되죠. 국민 통합을 돕기도 하고요. 왕족이 잘 못하면, 왕실 관련 스캔들을 보도하느라 신문이 잘 팔리고요.

민주국가인 대한민국도 과거 조선시대에는 왕이 있던 군주제였죠. 조선 왕족들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도록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고 해요. 일부는 일제에 협력하기도 했죠. 하지만 한국인 마음속에 조선 왕실이 조금씩 지위를 되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요. 고종의 손자인 이석(77) 황실문화재단 총재가 지난 10월 미국에서 나고 자란 조선 왕실의 후예 앤드루 리(34)씨를 '왕세자'로 책봉한 일이 외신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영국과 일본 왕실의 차이]

영국과 일본은 둘 다 군주제지만 왕위 계승 방식은 달라요.

영국은 현재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처럼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어요. 다른 유럽 국가에도 여왕이 드물지 않지요. 덴마크도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왕좌에 앉아 있어요. 스웨덴도 지금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가 퇴위하면 장녀인 빅토리아(40) 공주가 여왕이 될 전망입니다. 네덜란드, 스페인 등도 여왕 즉위가 가능합니다. 중세에도 유럽에선 여왕이 간간이 등장했어요. 단 프랑스와 독일은 여성에게 토지를 물려줄 수 없도록 규정한 '살리카 법'의 영향으로 한 번도 여왕이 없었답니다.

반면 일본은 황실전범(皇室典範)이라는 법률에 따라 남성만 왕위에 오를 수 있어요. 현재 일본 왕족은 아키히토 일왕의 형제와 직계 자녀,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 17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일왕 자신은 뺀 숫자랍니다.

그중 남성은 나루히토(58) 왕세자와 그의 동생 후미히토(53) 친왕,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 히사히토(12) 친왕, 아키히토 일왕의 동생인 마사히토(83) 친왕 등 네 명뿐이죠. 이 중 앞으로 다음 세대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사실상 히사히토 친왕뿐이라 "여성도 왕이 될 수 있게 법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조심스레 나오곤 한답니다. 친왕(親王)은 일본인들이 왕자에게 붙이는 칭호예요.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 특파원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