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찾아낸 그리스 서사시의 진실

입력 : 2018.12.07 03:09

트로이 발굴(1871~)

하인리히 슐리만
최근 그리스 정부 소속 과학자들이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테네아'라는 고대 도시 유적을 발굴했어요. 테네아는 트로이전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뒤 생존자들이 도망가서 세운 도시라고 해요.

트로이전쟁은 서양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의 소재입니다. 10년에 걸친 트로이전쟁 중 마지막 해에 약 50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파리스 등 쟁쟁한 영웅들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전쟁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전쟁은 신화냐 역사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지금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지요. 테네아가 발굴되면서 트로이전쟁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증거가 하나 더 늘어난 거예요.

트로이의 존재가 증명된 건 19세기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Schliemann· 1822~1890·작은 사진) 덕분이에요. 그는 유년 시절 읽은 '일리아스'를 그대로 믿고, 직접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어요.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슐리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먼저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 '일리아스'에 대해 알아볼게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Odysseia)'의 작가 호메로스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8세기 말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나 언제 숨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썼는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건지도 확실치 않죠. 호메로스가 여러 명이라는 주장도 있어요.

트로이전쟁은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보다 수백년 앞선 기원전 1300~120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해요. 하지만 호메로스 이전에 이 전쟁에 대해 기록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아요. 짐작하건대 트로이전쟁은 여러 음유시인의 기억과 노래를 통해 구전된 것 같아요. '일리아스'라는 제목은 '일리온(Ilion)의 노래'라는 뜻이에요. 일리온은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터키 동부에 남아있는 트로이 유적.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진짜라고 믿고 19세기 이곳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내요. 허구인 줄 알았던 트로이가 역사였다는 게 확인된 거죠. 트로이 문명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어요.
터키 동부에 남아있는 트로이 유적.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진짜라고 믿고 19세기 이곳에서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내요. 허구인 줄 알았던 트로이가 역사였다는 게 확인된 거죠. 트로이 문명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어요. /터키문화관광부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아요. 트로이전쟁을 다룬 여덟 편의 그리스 서사시를 '에피코스 키클로스'라고 부르는데요, 그중 두 번째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랍니다. '일리아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그리고 있지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다섯 번째 서사시인 '일리오스의 함락'에 나옵니다. 이건 호메로스가 아니라 아크르티노스라는 시인이 썼다고 알려져 있어요.

'일리아스'와 함께 호메로스가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일곱 번째 서사시 '오디세이아'랍니다.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역경을 딛고 10년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사실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하기 전까지 대다수 사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적 허구라고 생각했어요. 슐리만의 발굴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트로이 유적 지도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태어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자랐어요.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가 어린 슐리만에게 그리스·로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요. 어린 슐리만은 어딘가에 트로이 유적이 묻혀 있을 테니, 발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는 14세에 식품점 직원으로 일하게 돼요. 어느 날 가게에 술 취한 손님이 들어와 '일리아스'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낭송하는 걸 듣고, 잠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렸지요. 이후 슐리만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이 잘 풀려서 1845년 러시아에 무역회사를 세웠어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크림전쟁(1853~1856)을 벌일 때 군수물자를 팔아 큰돈을 벌었죠. 돈을 충분히 모았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에 뛰어들었어요.

그때까지 많은 사람은 터키의 부나르바시 마을이 트로이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슐리만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히사를리크일 거라고 봤어요. 그쪽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지형에 더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죠. 히사를리크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끝에 있어요.

슐리만은 1871년 히사를리크 발굴에 착수했어요. 놀랍게도 이 지역은 한 시대의 유적 위에 다음 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곳이었어요. 무려 아홉 층이 쌓여 있었지요. 그는 그중 두 번째로 오래된 층(기원전 2500~2200년 추정)에서 성벽과 성문 유적을 발견했고, 트로이 유적이라고 확신했어요.

지금까지 나온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진짜 트로이 유적이 묻힌 층은 슐리만의 생각과 달리 그보다 1000년 뒤에 형성된 일곱 번째 층(기원전 1275~1100년 추정)이었어요. 슐리만은 커다란 업적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오로지 트로이 발굴에 몰두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써가며 성급하게 땅을 파헤쳤어요. 그 바람에 일곱 번째 층에 있던 진짜 트로이 유적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버렸지요.

그런 이유로 "슐리만은 아마추어였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와요. 발굴한 유물 일부를 빼돌린 탓에 '도굴꾼'이라는 욕도 먹지요. 하지만 그의 열정으로 수천년 잠들어 있던 유적이 빛을 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요. 지금도 고고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