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덕수궁 있는 서울 '정동'… '정릉'에서 나온 이름이에요
입력 : 2018.12.05 03:00
[신덕왕후 정릉]
버들잎 띄운 물로 태조와 인연 맺어… 세상 뜨자 지금 덕수궁 근처에 묻혀
왕자의 난 일으킨 태종 이방원이 사대문 밖으로 계모 무덤 옮겼죠
문화재청이 지난달부터 서울의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의 재실 행랑채를 주말마다 작은 도서관으로 개방하고 있어요. 정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 즉 무덤입니다. 재실이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고, 행랑채는 재실에 딸린 아담한 건물입니다. 문화재청은 도서관 이름을 '신덕황후 도서관'이라 짓고 고인의 일화를 바탕으로 이곳에 있는 방을 각각 '버들잎방'과 '빗물방'이라 이름 지었답니다. 그 얘기는 좀 뒤에 해드릴게요.
신덕왕후는 태조가 극진히 사랑했던 왕비입니다. 태조가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아야 하나' 고민할 때,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용기를 북돋워준 당찬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신덕왕후가 1396년 마흔 살로 숨지자, 태조는 몹시 슬퍼하며 지금 중구 정동 영국 대사관 근처에 아내를 묻었답니다. 그 무덤이 어째서 지금은 성북구에 있는 걸까요?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준 그녀
이성계는 원래 고려의 무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함경도 영흥 지방에서 태어나, 원나라가 고려의 동북부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지요.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쳐 크게 이름을 떨쳤고 그걸 바탕으로 고려 조정에 진출합니다.
신덕왕후는 태조가 극진히 사랑했던 왕비입니다. 태조가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아야 하나' 고민할 때,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용기를 북돋워준 당찬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신덕왕후가 1396년 마흔 살로 숨지자, 태조는 몹시 슬퍼하며 지금 중구 정동 영국 대사관 근처에 아내를 묻었답니다. 그 무덤이 어째서 지금은 성북구에 있는 걸까요?
◇물 위에 버들잎을 띄워준 그녀
이성계는 원래 고려의 무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함경도 영흥 지방에서 태어나, 원나라가 고려의 동북부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지요.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쳐 크게 이름을 떨쳤고 그걸 바탕으로 고려 조정에 진출합니다.
- ▲ /그림=안병현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이성계와 강씨의 만남엔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게 바로 버들잎 설화랍니다. 이성계가 여름철에 말을 달려 계곡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개울에서 빨래하던 강씨에게 물을 청하자 강씨가 물에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고 합니다. 물을 급하게 마시다 체할까 봐 염려한 거죠. 이성계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두 번째 왕비였던 장화왕후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에피소드예요.
◇"내 아들이 세자가 돼야 한다"는 욕심
당시 이성계는 한씨와 이미 아들 여섯, 딸 둘을 두고 있었어요. 이성계는 강씨를 얻은 뒤로는 주로 개경에서 살아가며 한씨에게 소홀했다고 합니다. 한씨는 쓸쓸히 세월을 보내다가 태조가 조선을 세워 왕위에 오르기 한 해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납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세상을 떠난 첫 부인 대신 강씨가 조선의 첫 왕비가 됩니다. 강씨는 남편 이성계보다 스물한 살, 첫 부인 한씨보다 열아홉 살 어렸습니다. 이성계와 사이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어요.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지 몇 달 만에 강씨가 낳은 두 아들 중 열 살짜리 막내 방석을 세자로 봉합니다.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도록 도운 장성한 아들들은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왕후인가, 황후인가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하자,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만들고 정릉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덕수궁이 있는 동네를 정동(貞洞)이라고 하는데, 정릉에서 나온 지명입니다.
2년 뒤 이성계가 병들어 자리에 눕자, 첫 부인 한씨의 아들들이 이방원을 중심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이방원이 사병을 시켜 아버지의 측근인 정도전과 남은 등을 죽이고, 신덕왕후가 낳은 왕자 방번(당시 17세)과 세자 방석(당시 16세)을 귀양 보냈다 자객을 시켜 살해했어요.
권력을 잡은 이방원은 훗날 왕위에 오른 뒤 "옛 임금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 건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게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지위를 낮추었어요.
신덕왕후는 조선 제16대 왕 현종 때(1669년)에 와서야 송시열의 상소로 복위됐어요. 신덕왕후가 복위되던 날, 정릉 일대에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해요. 억울한 넋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신덕왕후에서 '신덕황후'로 칭호를 높여주었기에, 이번에 새로 꾸민 도서관 이름이 '신덕왕후 도서관'이 아니라 '신덕황후 도서관'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