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재미있는 과학] 18세기 말 佛 과학자들은 1m 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

입력 : 2018.11.29 10:03

[국제도량형]
지구 둘레 '자오선'에 맞췄지만 특정 시간에 빛이 가는 거리로 개정
최근 130년 만에 '㎏' 기준 변경… 변하지 않는 숫자 '상수' 이용했죠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은 마패와 함께 놋쇠로 만든 자인 '유척'을 들고 다녔어요.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제대로 세금을 걷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지요. 예전에는 옷감으로 세금을 냈는데, 나쁜 관리들이 눈금이 큰 자를 사용해 백성들에게 옷감을 필요 이상 많이 걷은 뒤, 나라에서 정해준 분량만 위에 올려 보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고스란히 챙겼거든요. 그래서 암행어사가 정확한 유척을 들고 다니면서 관리들이 옷감 걷을 때 쓰는 자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불시에 점검했어요. 오늘날처럼 정확한 도량형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답니다. 도량형이란 길이·크기·무게·부피·밀도·농도 같은 사물의 다양한 속성을 재기 위한 척도예요.

◇세계 공통의 보편적 단위

인류가 농업이나 어업에 의존하던 시대에는 도량형을 정확하게 정하는 게 지금처럼 중요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럴 수 있는 과학적 지식도 부족했고요. 그래서 나라마다, 지방마다, 동네마다 제각각 다른 도량형을 썼기 때문에 혼란이 많았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언제 어디서 누가 재건 똑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도량형을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됐어요. 이때 앞장선 나라가 프랑스였지요.

[재미있는 과학] 18세기 말 佛 과학자들은 1m 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
/그래픽=안병현
1791년 프랑스 과학자들이 길이를 재는 미터(m)를 처음 선보였어요. 미터는 '잰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메트론(metron)'에서 따온 말이랍니다.

그 뒤 수년에 걸쳐 과학자들이 질량을 재는 킬로그램(㎏), 부피를 재는 리터(L), 넓이를 재는 아르 등을 잇달아 만들어 냈어요. 이 중 아르는 지금은 쓰지 않고 있어요.

이후 과학과 산업이 한층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그와 함께 단순히 길이·부피·질량을 넘어 수많은 도량형이 필요해졌지요. 가장 먼저 추가된 것은 시간을 의미하는 '초(s)'랍니다. 1935년에는 전류 단위인 '암페어(A)'가, 1948년에는 온도 단위 '캘빈(K)'과 광도 단위인 '칸델라(cd)'가 국제단위계에 추가됐어요. 화학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물질량 단위인 '몰(mol)'도 추가됐고요. 몰은 원자나 분자 개수를 바탕으로 물질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랍니다.

지금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국제단위계(SI)'를 공통적으로 쓰고 있어요. 국제단위계란 프랑스가 만들어낸 미터법을 기준으로, 1960년 국제도량형총회가 채택한 도량형 체계예요. 기본단위 7개와 여기서 파생된 유도단위 22개로 이뤄져 있지요.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

이렇게 과학의 도량형을 다시 정하는 작업은 도대체 누가 맡고 있는 걸까요? 국제도량형국에서 주관하는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단위를 결정한답니다. 1875년 이후 대략 4년에 한 번씩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어요.

그동안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오간 논쟁의 역사는 꽤 흥미로워요. 과학자들이 단순히 새로운 단위를 추가하기만 해온 것이 아니라, 기존 단위를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갑론을박해왔거든요. 시대 흐름에 따라 각 단위의 정의가 계속 바뀌었어요.

예를 들어 프랑스 과학자들은 맨 처음에 길이 단위인 미터를 '북극점과 프랑스 파리, 남극점을 지나가는 지구 둘레(자오선)의 4000만분의 1'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자오선의 길이가 항상 일정한 것은 아니더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자오선의 길이가 변하면 자오선의 길이를 기준으로 정한 1m도 조금씩 바뀐다는 뜻이잖아요? 도량형은 불변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렇게 들쭉날쭉해서야 큰 문제지요. 과학자들은 결국 1983년 '빛이 진공상태에서 약 3억분의 1초 동안 지나는 거리'를 1m라고 다시 정의했답니다.

질량을 나타내는 킬로그램도 과학자들을 머리 아프게 했어요. 1889년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국제 킬로그램 원기(原器·도량형의 표준이 되는 기구)'를 만들었는데, 변치 않는 물질이라던 백금과 이리듐도 100여 년 세월이 지나는 사이 원래보다 수십 마이크로그램(㎍·1마이크로그램은 100만분의 1g) 가벼워지고 만 거예요. 워낙 미세한 변화라 당장 산업 현장이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더 엄중한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논란이 이어졌어요.

지난 16일에 열린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도 이런 논란을 종합해 킬로그램의 기준을 새로 만들었어요. 시간에 따라 변하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 대신 불변하는 값인 상수(常數)를 이용해 질량을 측정하기로 한 거예요. 이번 총회에서는 킬로그램뿐 아니라 암페어(A), 캘빈(K), 몰(mol) 등 단위들도 상수를 이용해 새로 정의 내렸어요. 총회에 참가한 60여 개국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지요.

◇일상엔 변화 없어요

도량형을 놓고 과학자들이 논란을 벌인다고 도량형 체계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니에요. 도량형 체계를 이루는 여러 단위가 각각 더 정밀하게 발전해갈 뿐이죠. 앞으로 각국 정부와 기업과 학계는 이번 총회 결과를 활용해, 저울이나 자처럼 실제로 물질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 해요. 킬로그램 원기가 변했듯이, 측정 기계도 고장 나거나 달라지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개별 측정 기계가 고장 난다고 해도, 만국 공통의 확실한 '정의'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 고치거나 다시 만들면 되니까 아무 문제 없어요.

이번 총회에서 결정된 정의는 내년 5월 20일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될 예정이에요. 일상생활에서 아무도 얼른 못 느끼고 지나갈지 모르지만 사실은 거대한 변화예요. 그래서 과학자들 사이에선 이번 총회 결과를 두고 "엄청나게 변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Huge change but no change)"는 말이 오간답니다.



오가희 과학칼럼니스트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