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아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훈육… 父子간 비극 불렀죠
입력 : 2018.11.21 03:00
[영조와 사도세자]
10세 이후 학문과 멀어진 사도세자… 영조가 여러 사람 앞에서 꾸짖기도
세자는 정신병 심해져 살인 저질러…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 맞았어요
지난달 10세 어린이가 동네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들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는데, 복지기관 직원이 아동 학대라고 판단해 아버지와 아이를 임시로 떨어뜨려 놓은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엄하게 훈육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훈육이 아니라 학대에 가까웠던 거예요.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어요. 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아들이었던 세자 선을 교육하며 했던 언행이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일으켰지요.
◇늦게 얻은 귀한 아들
1735년 1월 21일,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창경궁 집복헌이라는 곳에서 왕자를 낳았어요. 영조는 41세, 영빈 이씨는 당시로썬 노산(老産)인 39세였어요.
신하들이 영조 임금을 찾아가 축하하는 말을 올리니 영조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어요. "삼종(三宗)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열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어요. 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아들이었던 세자 선을 교육하며 했던 언행이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일으켰지요.
◇늦게 얻은 귀한 아들
1735년 1월 21일,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창경궁 집복헌이라는 곳에서 왕자를 낳았어요. 영조는 41세, 영빈 이씨는 당시로썬 노산(老産)인 39세였어요.
신하들이 영조 임금을 찾아가 축하하는 말을 올리니 영조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어요. "삼종(三宗)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열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 ▲ /그림=안병현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후궁인 정빈 이씨에서 첫아들인 효장세자를 얻었지만, 1728년 효장세자가 9세 나이에 숨진 탓에 아들이 없어 애를 태웠어요.
큰아들 효장세자가 죽은 지 7년 만에 영빈 이씨가 아들을 낳자, 곧바로 중전의 양자로 삼고 이듬해 돌이 지나자마자 세자로 책봉했어요. 이름은 선(愃)이라고 지었지요.
세자는 총명하고 의젓해 영조 임금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어요. 그런데 세자가 10세를 넘기면서, 영조의 기대는 실망으로, 칭찬은 꾸짖음으로 바뀌고 맙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자는 성품이 책을 좋아하고 똑똑해서 3세 때 '왕'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조를 가리키고 '세자'라는 글자를 보고는 자신을 가리켰다고 해요. 또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유교 경전인 '효경'을 읽고 '천지왕춘(天地王春·온 세상이 임금의 은택을 입은 봄)'이라는 글자를 쓴 일도 있어요. 영조가 이를 신하들에게 자랑하며 세자를 영특하게 여겼다고 해요.
하지만 세자가 10세를 넘기면서 세자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먼 훗날 쓴 '한중록'이라는 책을 보면, "세자는 늘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해,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한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는 대목이 나와요. "세자가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 타기 같은 놀이에만 열중하여 학문에만 힘쓰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에 어긋났다"는 대목도 있고요.
영조는 그런 세자를 따뜻하게 타이르기보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꾸중하거나 흉을 보는 등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세자가 9세이던 1744년에 영조가 세자에게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물은 적이 있다고 해요. 세자는 한참 동안 있다가 "싫을 때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영조는 "동궁(세자)의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대답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세자의 솔직한 답변을 귀엽게 여기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실망감이 컸을 거예요.
◇훈육일까, 학대일까
'조선왕조실록'은 세자가 10세 이후 점차 학문에 태만해졌다고 적고 있어요. 영조는 그런 세자에게 언제 무엇을 했으며, 며칠에 무슨 책,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 꼼꼼하게 기록해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엄하게 지시했어요. 세자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영조는 세자를 심하게 꾸짖었고, 세자는 점점 아버지인 영조를 꺼리고 멀리하게 됐지요.
영조가 사사건건 세자를 꾸중하자 세자는 결국 정신병이 심해져 죄 없는 주변 인물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영조는 1762년 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어요. 세자는 그 안에서 죽어갔죠. 겨우 27세였어요. 이처럼 비참한 죽음을 당한 세자 선이 바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예요.
사실 전통 사회에서도 부모가 아이들을 막 대한 건 아니었어요. 정조 때 학자 이덕무가 쓴 '사소절' 속에는 "아이에게 허물이 있더라도 함부로 꾸짖거나 마구 때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어요. 천도교 경전에도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는 내용이 들어 있고요.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도 천도교인이었죠. 옛 사람들도 어린이를 소중하게 길러야 하며 마구잡이로 야단쳐선 안 된다고 믿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