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1903년 하와이로 떠난 102명… 美 동포들 성공 씨앗 됐죠

입력 : 2018.11.16 03:02

[한국인 미국 이민의 역사]
1905년까지 7000명 넘게 이주
사탕수수 농장서 하루 10시간 노동… 사진만 보고 이민 남성과 결혼하기도

지난 6일 미국에서 상·하원 의원 선거가 열렸어요. 한국계 미국인 영 김(56·공화당)씨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앤디 김(36·민주당)씨가 뉴저지주에서 연방 하원 의원으로 출마했어요. 아직 개표가 덜 끝나 속단하긴 이르지만 두 사람 모두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만약 두 사람의 당선이 확정되면, 1992년 김창준(79) 전 하원 의원이 처음으로 연방 의회에 진출한 지 26년 만에 새로운 한국계 의원이 탄생하는 거랍니다.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영 김씨는 미국 정치계에 독도 문제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린 주역이에요. 앤디 김씨는 오바마 정권에서 중동 전문가로 활약했고요. 아시아계인 두 사람이 지금 위치에 오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았을 거예요. 미국에 처음 발 디딘 최초의 한국인 이민자들은 이들보다 더욱 심한 차별을 겪었을 테고요.

미국에 건너간 첫 조선 사람은 1883년 고종의 외교사절단으로 워싱턴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예요. 그 뒤 조선 근로자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가면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이 시작됩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시작된 아메리칸 드림

19세기 말 하와이에선 사탕수수 재배가 활발했어요. 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해 애먹었지요. 농장주들은 궁리 끝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1858~1932)에게 노동자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알렌이 고종을 설득해 여권을 담당하는 '유민국'을 설치하고 이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지요.

1913년쯤 하와이에 도착한‘사진 신부’들이에요.
1913년쯤 하와이에 도착한‘사진 신부’들이에요.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 소리’
먼저 도착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어요.
먼저 도착한 하와이 이민자들이 새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보는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1903년 1월 13일, 조선인 102명이 하와이 땅을 밟았습니다. 이들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7000명 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거의 모두 남자였어요.

요즘은 해외에 대한 정보가 넘치지만, 그때는 하와이가 어딘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간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런데도 이민을 결심한 건 하와이가 '풍요의 땅'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었죠. 쇠락해가는 조선에서 고생스럽게 살던 백성들에게 하와이는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의 땅'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답니다. 조선인 근로자들은 일요일만 빼고 하루 10시간씩 일해야 했어요. 그렇게 일해봤자 임금은 하루 70센트에 불과했지요. 문화적 차이도 고통을 더했다고 합니다. 남녀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푸에르토리코 노동자들의 파티를 보고 조선 사람들이 기겁했다고 하네요. 미국 역사학자 웨인 패터슨이 쓴 '하와이 한인 이민 1세'라는 책 속에 "조선에서 여자가 춤추고 노래하는 건 기생이나 무당만 하는 일이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조선인의 회고담이 나올 정도랍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기 때문에 식료품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어떤 조선인은 달걀을 사려고 자기 주먹에 흰 손수건을 둘러씌운 뒤 엉덩이에 가져다 대고 닭이 알 낳는 소리를 흉내 내 달걀을 샀다고 해요. 보는 이들에겐 재밌는 광경이었을지 몰라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식료품점에서 암탉 흉내를 내는 심정은 썩 좋지 않았을 거예요.

◇사진만 보고 바다를 건넌 새 신부

하와이 이민을 선택한 조선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딛고 정착하는 데 성공했어요. 많지 않은 액수나마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기도 하고, 고생 끝에 약간의 재산을 모으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하와이에 온 이민자들은 노총각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사진결혼'이 등장했어요. 조선에 있는 처녀와 하와이에 있는 노총각이 사진으로 선을 보고 결혼을 약속하는 거예요.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여자들을 '사진 신부'라고 불렀어요. 중매쟁이들은 조선 처녀들에게 "하와이로 시집가면 끼니도 땔감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득했다고 해요.

결혼을 결심한 처녀들은 우선 남자 호적에 등록한 뒤, 긴 여행을 준비했어요. 서울에 가서 비자를 얻고 미국 영사관에서 신체검사를 받는 게 시작이었죠. 출발하는 날까지 영어 공부도 해야 했고요. 그리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어요.

그리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다시 한 번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기생충 검사를 주로 했는데, 이때 검사에 걸리지 않으려고 건강한 사람 대변을 자기 것으로 바꿔 통과하기도 했대요. 이어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9일 동안 배를 타고 갔어요. 거기서 마지막 신체검사와 간단한 영어 시험을 봤지요. 이 힘든 절차를 거쳐야 신랑을 만날 수 있었어요.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이상형을 만났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겠지요. 하와이 총각들이 보낸 사진은 실물과 차이가 컸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았어요. 아열대기후에서 고된 노동을 하느라 그을린 얼굴이었죠. 비싼 양복을 빌려 입고 좋은 집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실제론 집도 돈도 없는 경우조차 있었어요. 하지만 사진 신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는 데다, 결혼을 취소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겨졌어요.

하와이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나중에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미국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미국 서부에 한인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부터 한인들이 퍼져나갔기 때문이에요.

1924년 미국이 일본인 이민을 금지하면서 미국으로 가는 조선인 사진 신부들도 사라졌어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됐기 때문에, 새 이민법을 적용받았던 거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오늘날 미국 동포들의 성공 뒤에는 이민 초창기 세대들의 고생이 있었답니다.


안영우 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