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새먼의 국제 뉴스 따라잡기] 터키서 사우디 언론인 암살… '왕실이 관여했다'는 의혹

입력 : 2018.11.13 10:16

카슈끄지 피살 사건

터키에서 벌어진 암살 사건 때문에 전 세계가 떠들썩해요.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게 발단이에요. 터키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남의 나라(터키)에 18인조 암살단을 보내 카슈끄지를 암살했다"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판하고 있어요. 암살단을 보낸 건 사우디 왕세자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마 처참한 지경일 거라고 해요.

국제사회를 뒤흔드는 끔찍한 암살 사건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여러분은 '암살' 하면 누가 먼저 떠오르세요? 역시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가 아닐까요?

본드는 냉정하고 정중하고 세련된 암살자예요. 일대일 격투의 달인이자, 온갖 첨단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세계 곳곳의 이국적인 장소를 누비며 임무를 실행하지요. 암호명 '007'에서 '00'은 임무를 위해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살인면허'를 뜻해요.

물론 본드는 실존 인물이 아니죠.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이 지어낸 인물로, 소설책 12권과 영화 26편에 등장해요. 하지만 본드가 100% 허구는 아니에요. 플레밍은 실제로 2차 대전 때 영국 해군 정보부에 근무했어요. 2차 대전 때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광범위한 스파이 조직을 무자비하게 효율적으로 가동했어요.

지난달 25일,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 앞에서 피살된 언론인 카슈끄지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한 참가자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가면을 쓰고 있어요.
지난달 25일,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 앞에서 피살된 언론인 카슈끄지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한 참가자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가면을 쓰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현대사회에도 암살자들이 여전히 암약하고 있어요. 지난 3월, 러시아 연방보안국(GRU) 요원들이 영국 솔즈베리에 가서 영국에 숨어 살던 전직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스크리팔을 악몽에나 나올 법한 비밀 무기로 살해하려 했어요. '노비촉'이라는 신경화학무기였죠.

작년 2월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사달이 벌어졌어요. 북한 스파이들이 동남아 여성들을 훈련해 암살에 동원했거든요. 북한 요원들에게 훈련받은 동남아 여성들이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형 김정남에게 접근해 맹독성 신경작용제를 몸에 발라 숨지게 했어요.

그런데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암살은 원래 남몰래 비밀리에 저지르는 범죄가 아니었나요? 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이런 암살 사건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정보가 자유롭게 국경 없이 흐르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각국 정부가 아무리 고삐를 당기려 해도, 하이테크가 갈수록 빠르게 보편화되고 있어요. 인터넷과 미디어, 감시 카메라망과 출입국 관리 시스템,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검색 엔진,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새 인터넷에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을 인공지능을 동원해 찾아내는 기술…. 이런 요소 때문에 스파이들이 옛날 007처럼 비밀스레 다닐 수 없고, 각국 정부가 관련 정보를 숨길 수도 없게 됐어요.

그렇게 찾아낸 현실의 암살자들은 허구의 007처럼 신비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어요. 영국에서 공격받은 스크리팔이 좋은 예지요. 영국과 러시아 경찰은 비밀 정보를 활용해 스크리팔을 죽이려 한 범인들을 잡아낸 게 아니에요. 그들은 감시 카메라나 검색 기록처럼 누구나 접근 가능한 인터넷 정보를 활용해 범인들을 잡아냈어요.

소설·영화 속의 007은 아무도 모르게 완전범죄를 저지르지만, 현실은 달라요. 반체제 언론인을 죽인 사우디 암살조, 김정남을 죽인 북한 암살조 모두 완전범죄를 저지르기는커녕 사건 현장 곳곳에 수많은 지문을 어수룩하게 남겼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암살을 지시한 걸까요? 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이 암살범들이 개인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 국가의 지시를 받아 국가의 인프라를 이용해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이에요.

사우디 정부도, 북한 정권도 자기네는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범인들이 정부 지시도 없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얘기가 돼요. 무서운 일이죠. 하지만 사우디 정부나 북한 정권이 실제로 암살범들에게 "정적을 죽이라"는 지시를 내렸다면 그건 더욱 무서운 일이에요.

이런 암살 사건들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덕적 질문을 던져요. 하나하나의 범행 뒤에는 그런 암살자를 내보내는 '지휘자'나 '통치자'가 있다는 얘기니까요. 피부색이 어떻건 신념이 어떻건, 정상적인 도덕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문명사회의 정부가 그런 일을 저지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데 동의할 거예요.

각국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암살자와 스파이를 훈련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그 두 가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를 대고 암살자나 스파이를 보내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에요. 007 같은 사람들이 설치는 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야지, 평상시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야 문명사회 아닐까요.

※기사 내용은 아시아타임스 논조와 무관한 새먼 특파원의 자유로운 의견입니다.


앤드루 새먼·아시아타임스 동북아 특파원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