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베토벤이 지은 바이올린 曲… 소설로 다시 태어났죠

입력 : 2018.10.27 03:07

크로이처 소나타

교양 강의 시간에 지금 막 떠오르는 클래식 음악을 말해달라는 질문을 하면 작품 번호(opus)를 말하지 않고 표제나 별명이 붙은 곡을 대답하는 사람이 많아요. 제목 있는 곡이 상대적으로 더 잘 떠오르기 때문이겠지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작품이 훌륭해서 작품 번호 말고 다른 이름이 붙었다고도 할 수 있죠. 이번에 소개할 작품도 표제가 붙어 있는 명곡인데요, 이름이 붙기까지 흥미로운 과정을 거쳤습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곡 선물해 붙은 별명

이 소나타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Beethoven·1770~1827)이 1803년 발표했어요. 베토벤이 남긴 바이올린 소나타 열 곡 가운데 아홉 번째 작품이죠. 전체 작품 번호로는 47번입니다. 이 곡은 베토벤이 영국에서 활동하던 흑인 혈통의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리지타워(Bridgetower·1778~1860)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어요. 베토벤과 친분이 있던 브리지타워는 화려한 기교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전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죠. 두 사람은 1803년 5월 이 소나타를 성공적으로 초연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연주 직후 두 사람은 음악과 상관없는 일로 심하게 다투었어요. 화가 난 베토벤은 브리지타워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로 했던 계획을 바꿔,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크로이처(Kreutzer·1766~1831)에게 이 소나타를 선물했어요. 작품의 별명 크로이처는 이런 계기로 붙게 된 거죠. 그런데 정작 크로이처는 이 작품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 곡은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브리지타워와 멋진 연주를 하려고 만들었기에 어려우면서도 화려한 기교와 극적인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어요. 세 악장으로 되어 있고, 연주 시간이 40분 가까이 걸리는 대곡입니다. 1악장은 바이올린 혼자 연주하는 아다지오(매우 느리게) 서주(序奏)로 시작해서 곧 프레스토(매우 빠르게)로 속도를 바꿔 바이올린과 피아노 두 악기가 서로 경쟁하듯 격렬하게 멜로디를 이어갑니다.

비극적 느낌이 강한 1악장이 끝나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변주곡 형식의 2악장이 시작되죠. 2악장은 4분의 2박자로 된 주제와 네 개의 변주로 구성됐어요. 때론 애교스럽고 때론 평화로운 분위기를 내며 휴식 같은 순간을 선사합니다. 마지막 악장인 3악장은 다시 프레스토인데, 타란텔라(8분의 6박자로 된 빠른 춤곡) 풍의 신나는 소나타 형식이에요. 탄력 있는 리듬으로 튀어오르듯 연주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리듬 대결이 흥미진진하죠.

◇베토벤 곡에서 영감 받은 대문호

한 번만 들어도 그 강한 인상 때문에 결코 잊히지 않는 크로이처 소나타에 주목한 소설가가 있었어요.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Tolstoy·1828~1910)였죠. 톨스토이는 아들이 연주하는 크로이처 소나타를 듣고 영감을 받아 1889년 중편소설 '크로이처 소나타'를 썼다고 알려졌어요.
베토벤(왼쪽)이 지은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 받은 톨스토이(가운데)는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어요. 야나체크(오른쪽)는 이 소설을 읽은 감상을 다시 곡으로 표현했어요.
베토벤(왼쪽)이 지은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 받은 톨스토이(가운데)는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어요. 야나체크(오른쪽)는 이 소설을 읽은 감상을 다시 곡으로 표현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소설의 주인공은 포즈드니셰프란 인물이에요. 그는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도중 함께 가는 승객들에게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 경험을 들려줍니다. 아내와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자기 아내가 외국에서 온 낯선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의심해 싸움 끝에 아내를 살해하고 말아요. 주인공이 두 사람 관계를 의심한 계기가 음악이었어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낯선 남자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한 아내가 선택한 곡이 바로 크로이처 소나타였습니다. 소설에서 포즈드니셰프는 이 곡의 강렬한 악상 때문에 광기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아요.

톨스토이는 평소 음악 애호가로 유명했어요. 차이콥스키의 현악 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에피소드도 많이 알려져 있죠. 톨스토이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기에 베토벤의 걸작을 들으며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소설이 다시 음악을 낳았어요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톨스토이 소설을 읽고, 그 감상을 음악으로 옮긴 작곡가도 있었죠. 체코의 국민음악파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Janacek·1854~1928)입니다. 국민음악파는 자기 민족 고유의 특색을 음악에 담은 19세기 후반의 서양 음악 사조예요.

야나체크도 독특한 작풍을 개척해냈어요. 야나체크가 1923년에 지은 현악 4중주곡 1번의 부제가 '크로이처 소나타'예요. 이 제목은 베토벤 작품이 아니라 톨스토이 소설을 가리켜요.

소설 내용처럼 이 곡의 분위기는 어두워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드러나 있죠. 야나체크는 이 작품에서 무모한 질투로 희생된 여인의 슬픔을 강조하려 했어요.

모두 네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 이 작품은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따르기보단 자유롭고 즉흥적인 진행을 보여줍니다. 1악장 첫머리에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제시하는 주제가 전곡을 지배하듯 계속 나타나요. 곧이어 첼로가 바쁘고 긴박한 느낌이 드는 주제를 연주하는데 역시 중요한 대목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2악장은 리듬이 격렬한 스케르초 풍이고 3악장은 느리고 서정적인 분위기예요. 4악장에선 다시 1악장의 느낌을 강조해 호소력 있는 악상을 전개하죠. 소설을 읽고 느낀 감상이 솔직하면서도 강하게 드러난 명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베토벤이 쓴 바이올린 소나타가 이렇게 또 다른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니 흥미롭지요? 위대한 작품이 또 다른 걸작을 낳는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