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고종 恨 서린 1.1㎞ 산책로, 이달부터 한 바퀴 돌 수 있죠

입력 : 2018.10.17 03:07

덕수궁 돌담길

여러분은 혹시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은 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요? 서울 도심의 덕수궁을 두고 전해오는 얘기예요. 왜 이런 말이 생겼는지 몇 가지 설이 있어요.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은 원래 미술관이 아니라 법원이었어요. 1995년까지는 대법원과 가정법원 건물로 쓰였죠. 이혼을 앞둔 부부들이 자주 찾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났다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설은, 돌담길 근처에 남학교인 배재학당과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있었는데, 두 학교를 각각 다니는 연인들이 함께 등교하다가 학교 근처에서 잡았던 손을 놓고 헤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 떠도는 이야기일 뿐 정확한 근거는 없어요.

◇앞으로 20년 동안 덕수궁 복원 공사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누구도 덕수궁 돌담길을 완전히 한 바퀴 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돌담길 북쪽 70m 구간이 주한 영국 대사관 부지에 포함돼 있어서 길이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이죠. 이 길이 이달 안으로 열리게 된다네요. 이렇게 되면 1.1㎞에 이르는 돌담길이 모두 이어지는 것이죠. 그럼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이제 사라질지도 몰라요.

돌담길 연결은 2038년까지 3단계로 진행되는 '덕수궁 제 모습 찾기' 사업의 일부예요. 지금 덕수궁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 공사가 한창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먼저 1단계로 연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광명문은 원래 임금이 주무시는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일제가 자기들 마음대로 이 문을 뜯어내 궁궐 서남쪽 자리로 옮겨 버렸습니다.

2단계는 2021년까지 돈덕전을 복원하는 거예요. 이 건물은 연회장과 숙소, 외국 사신의 대기 장소로 쓰였던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역시 일제가 허물어 버렸어요. 그다음엔 2038년까지 옛 경기여고 자리에 있었던 선원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다시 짓는 3단계예요. 선원전은 조선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던 전각이었습니다.

◇근대 개혁의 '꿈'이 서린 궁궐

이런 상황에서 덕수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새삼 커지고 있어요.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 덕수궁 관람 인원을 비교해 보면 6만 명 넘게 늘어났다고 해요. 왜 그럴까요?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은 전통 양식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어우러진 궁궐이에요. 서구 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대대적으로 개축한 궁궐이라 그래요. 이 시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함께 각광 받고 있는 겁니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임진왜란 전까지 덕수궁 자리에는 왕족의 저택이 있었어요.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선조 임금이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삼으며 궁궐이 됐어요.

그때 덕수궁은 경운궁이라 불렸어요.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아버지의 마지막 왕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가둬뒀어요.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한 뒤에는 왕실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됐죠.

이 궁궐이 역사의 주요 무대로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 말기였어요.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뒤, 고종 임금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년 만에 궁궐로 복귀했어요. 1897년 2월이었죠. 이때 고종은 원래 살던 경복궁 대신 경운궁, 곧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고종이 덕수궁을 의욕적으로 개축했다는 사실입니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덕수궁은 왕궁이 아닌, 황궁(皇宮)이 됐어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 중 황제가 있는 '제국(帝國)'은 왕이 있는 '왕국(王國)'보다 격이 높았습니다. 지금껏 왕국이었던 조선도 스스로를 제국이라 부르면서 더는 다른 나라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거예요.

고종은 이때부터 덕수궁에 많은 건물을 지었습니다. 국가 행사를 치르던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귀빈 접견용 건물인 덕흥전처럼 전통 궁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궁궐 중 처음으로 서양식 건물도 함께 지었다는 사실에 밑줄 그어 주세요. 석조전이 대표적이죠. '제국'으로 올라선 나라가 '근대' 궁궐을 지어 개혁에 나서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어요. 아쉽게도 석조전은 나라가 망한 직후인 1910년 12월에야 완공됐어요.

◇'망국(亡國)'의 수난과 아픔이 서린 곳

하지만 국내외 상황은 고종의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됐어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뒤 덕수궁 돈덕전에서 순종 즉위식이 열렸고요.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한 뒤 3·1운동이 일어났어요. 이후 일제는 갖가지 이유로 덕수궁 땅을 떼어내고 건물을 헐어 작은 공원처럼 쪼그라뜨렸어요.

대한제국에 대해서 '일제에 맞서 근대화를 추구했다'며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백성보다는 왕실의 권위에 신경 썼다'고 비판하기도 해요. 최근에는 '그래도 고종이 일제 침략에 앉아서 무작정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이 바로 덕수궁이지요.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