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김주영의 클래식 따라잡기] 바흐 사랑한 슈바이처, 모차르트서 영감받은 아인슈타인

입력 : 2018.10.13 03:07

음악을 즐긴 노벨상 수상자들

해마다 10월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노벨상 소식에 귀를 세워요.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폭넓게 관심을 불러모으는 상이라면 역시 노벨상이 아닐까 해요. 매년 스웨덴 한림원이 과학, 경제, 문학, 평화 부문에서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뽑아 상을 주지요.

여러분은 노벨상 수상자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인가요? 저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아프리카의 성자(聖者)' 알베르트 슈바이처(Schweitzer·1875~1965)가 맨 처음 생각나요. 얼마 전 슈바이처 박사가 생전에 일하던 아프리카 가봉의 병원에 다녀왔어요. 가봉 수도 리브르빌에서 200여㎞ 떨어진 랑바레네라는 소도시에 있어요.

그곳 슈바이처 병원에선 슈바이처가 세상을 떠난 지 53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어요. 랑바레네는 울창한 열대 숲이 있고 펠리컨 새, 염소, 고양이와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지만 기후가 덥고 습해 질병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에요. 병든 몸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희생하는 삶을 살았던 슈바이처 박사의 마음이 아프리카 대자연 이상의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음악가로도 활동했던 슈바이처

병원 중앙 홀에서 저는 바흐의 소품을 연주했습니다. 슈바이처가 가장 사랑했던 작곡가가 바흐였기 때문이에요. 슈바이처가 생전에 음악가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그는 의사이자 목사, 철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어요. 유명 음반사인 컬럼비아, 필립스 레이블 등에서 바흐 음반 20여 장을 냈지요.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을 보수하고 개선하는 데도 힘썼죠.

슈바이처는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있는 알자스 지방에서 가난한 목사 아들로 태어났어요.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서른 살 이후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는 37세가 되던 1912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아내와 함께 랑바레네로 떠납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독일인이란 이유로 프랑스군에게 억류당하고 고향으로 송환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아인슈타인(맨 왼쪽)이 1922년 11월 일본 도쿄 임페리얼호텔에서 아내 엘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바이올린을 켜고 있어요. 오른쪽 사진은 슈바이처가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아인슈타인(맨 왼쪽)이 1922년 11월 일본 도쿄 임페리얼호텔에서 아내 엘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바이올린을 켜고 있어요. 오른쪽 사진은 슈바이처가 오르간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프랑스로 국적을 바꾼 슈바이처는 유럽에서 음악도 연주하고 모금 활동도 하다가 1924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어요. '생명에 대한 경외'를 평생의 신조로 삼고 한센병, 정신질환과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옛 병원은 처음에 닭 사육장을 개조한 건물이었어요. 지금은 그의 기념관이 됐지요. 이곳에 가면 슈바이처 박사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일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요. 슈바이처가 바흐 음악을 연구한 자료도 있고, 피아노도 남아 있어요.

조그만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를 연주했을 슈바이처 모습을 상상해보니, 신이 자신에게 준 음악이란 재능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 걸작들을 남긴 바흐와 많이 닮았다고 느껴졌어요.

◇바이올린 연주 즐겼던 아인슈타인

슈바이처를 보고 "우리의 슬픈 시대에 살아 있는 유일한 위인"이라고 칭송한 사람이 있었어요.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Einstein·1879~1955)이었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뉴턴 이후 물리학에 가장 큰 변화를 이끌어낸 물리학자예요. 아인슈타인도 어려서부터 음악을 사랑했고 특히 바이올린 연주를 즐겼어요.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자랐어요. 어렸을 때 무척 엄격한 학교에 다녔는데, 우등상을 받기는커녕 졸업도 제대로 못할 만큼 성적이 부진했다고 해요.

다행히 아인슈타인의 삼촌이 조카의 뛰어난 두뇌를 알아봤어요. 삼촌의 충고로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아인슈타인은 열다섯 살 때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취리히 공대에서 학위를 받았어요. 그 후 스위스와 독일 등지에서 연구 활동을 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아인슈타인은 가족과 함께 전 세계를 돌며 강의를 했어요. 1921년 스웨덴 한림원이 아인슈타인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라고 발표했을 때도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강의 중이었다고 해요. 어디를 가든 그의 짐 속에는 항상 바이올린이 들어 있었어요.

아인슈타인은 독일에 히틀러가 등장하자 미국으로 옮겨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어요. 아인슈타인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다른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핵폭탄을 만들었기에, 아인슈타인은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했어요. 이때 그를 달래준 것도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나는 음악을 통해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해요. 모차르트 음악을 특히 좋아해 그의 악보를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서 일정한 규칙을 발견해내는 것을 즐기기도 했죠. 모차르트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상대성 이론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어요.

역사에 오래 남을 이름의 소유자들은 저마다 다른 무거운 책임감을 지니고 세상을 살아나갔습니다. 그들에게 음악은 일상생활과 자신의 일, 나아가 영혼을 밝혀주는 소중한 존재였어요.


김주영·피아니스트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