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해양 제국의 두 얼굴… 엄청난 富 뒤에 노예 무역 있었죠

입력 : 2018.10.12 03:07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

최근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15세기 '대항해 시대' 역사를 다룬 '발견의 박물관'을 세우는 일을 두고 논란이 일었어요. 포르투갈은 15세기에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에 뛰어들어 여러 식민지를 세웠는데요, 덕분에 일찍이 노예무역과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큰 경제 성장을 이뤘어요.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길이길이 기억하고 싶은 황금기겠지요.

하지만 한쪽에선 해당 박물관이 식민지 약탈 시대에 포르투갈이 저지른 대량 학살이나 노예제를 미화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어요. 또 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를 '발견'했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유럽 중심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나왔지요. 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어떻게 해양 대국으로 발전했을까요?

항해의 왕자, 엔히크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포르투갈은 8세기 초부터 13세기까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어요. 그래서 포르투갈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고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았어요. 14세기가 되자 중부 유럽에선 십자군 운동이 끝났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십자군 원정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성지를 되찾으려는 크리스트교 연합군이에요.

15세기 초 포르투갈 국왕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 엔히크가 포르투갈 십자군을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떠났어요. 그는 1415년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세우타를 점령했지요. 세우타는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 중심지였어요. 엔히크 왕자는 인도와 중국의 향신료, 비단, 보석을 보며 교역에 눈을 떴어요. 당시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수입하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뛰는 귀한 상품이었어요.

포르투갈 십자군이 점령한 세우타엔 더 이상 이슬람 상인들이 오지 않았고 동방의 산물도 구하기 어려워졌어요. 향신료를 얻기 위해서는 육로를 통해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을 지나가거나 새 항로를 찾아 동방과 직접 교역하는 방법밖에 없었죠. 엔히크 왕자는 동방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기로 했어요. 그리고 포르투갈 남부 사그레스에 천문학자, 조선 기술사, 지도 제작자 같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해양 학교, 조선소, 지도 제작소를 지었어요.

엔히크 왕자는 새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탐험대를 바다로 보냈어요. 하지만 아프리카 북서부는 파도가 거세 항해가 쉽지 않았어요. 큰 성과가 없던 탐험대는 15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싣고 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노예무역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이 시작됐어요. 엔히크 왕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서아프리카 항로 개척에만 집중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엔히크 왕자를 '항해의 왕자'라고 부르지요.

인도양 통해 향신료 무역 독점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열어준 항해의 왕자 덕에 이후에도 포르투갈 왕실은 해양 탐험대를 계속 후원해요.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인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도착했고 1498년엔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드디어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 인도 고아와 동남아시아 믈라카, 마카오에 무역 거점을 만들고 중국, 일본과도 교역을 트며 거대한 해양 제국을 만들었어요.

1497년 바스쿠 다가마가 항해를 떠나기 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1497년 바스쿠 다가마가 항해를 떠나기 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인도양 무역을 통해 대량의 향신료가 유럽에 수출되었고,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인도 고아를 거쳐 아시아로 퍼져 나갔어요. 이후 유럽 열강들이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포르투갈의 가장 큰 경쟁 상대였던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를 지원했어요. 그는 1492년 남·북 아메리카 사이 섬 집단인 서인도 제도를 발견했죠. 콜럼버스는 이곳을 인도라고 믿었어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영토 분쟁을 피하기 위해 경계선을 정해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 아래 두 국가가 협상해 세네갈의 베르데 제도에서 약 2000㎞ 떨어진 곳의 서쪽은 에스파냐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결정합니다. 이 조약이 바로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이에요. 막연하게 정했던 이 경계선은 아메리카 대륙을 갈랐고, 그 덕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얻게 되었지요.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과 노예무역

포르투갈 왕실은 고온다습한 브라질에 사탕수수를 심기 시작했어요. 브라질의 사탕수수 산업은 급성장했고 설탕으로 포르투갈은 큰 이익을 얻었어요. 16세기에는 브라질이 최대 설탕 생산국이 됐을 정도예요.

하지만 사탕수수 산업은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어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유럽인들이 전파한 전염병에 걸려 인구가 급속히 줄기 시작했지요. 줄어든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아메리카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중서부 기니만과 동부 해안 지대에 해상 수송 중계지를 건설하고 노예무역을 독점했어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도 노예무역에 뛰어들면서 16세기부터 2세기 동안 아메리카로 팔려 간 흑인은 1000만 명이 넘어요. 노예무역 상인들은 흑인들을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했어요. 이 외에도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원정대를 파견해 광산을 개발하고, 파우 브라질이라는 나무를 채벌하는 등 약탈을 이어갔습니다.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브라질, 아프리카 기니비사우와 앙골라, 모잠비크, 중국 마카오, 인도 고아 등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세웠고 새롭게 점령한 지역에 크리스트교를 전파했어요. 또 식민지를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공급하는 곳으로 이용해 엄청난 부를 얻었지요. 포르투갈이 기념하고 싶은 역사 이면에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브라질 나라 이름, 나무에서 따왔어요

파우 브라질(pau-brasil)은 '불꽃처럼 빨간 나무'라는 뜻으로 포르투갈 탐험대가 발견했어요. 이 나무로 붉은 염료를 만들 수 있죠. 현재 '브라질'이라는 나라 이름은 이 나무를 채취하는 사람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브라질레이로(Brasileiro·브라질 사람)'에서 따왔어요.




윤서원·이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