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매력, 전교생이 푹 빠졌다

입력 : 2018.10.04 03:28 | 수정 : 2018.10.04 03:30

체계적인 읽기·글쓰기 프로그램으로 성과 거둔 대구 경상女高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들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 거야." "새로운 시대인 만큼 전에 없던 일자리가 많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달 21일 대구 경상여고 강당. 이 학교 자율 동아리 '북콘서트' 소속 학생들이 유명 석학인 클라우스 슈밥의 저서 '제4차 산업혁명'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조에 속한 학생들은 '로봇시대 인간의 일'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같은 책을 읽고 또 다른 주제로 대화 중이었다. 토론이 끝나자 장석황 지도 교사는 "오늘 토론한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경상행복미소방'에 올려달라"고 말했다. 대구 북구에 있는 경상여고는 사교육이 발달하거나 교육열이 높은 지역의 '입시 명문'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해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 수도권대학입학사정관협의회 등이 선정한 '잘 가르치는 베스트 일반고' 전국 11개교 중 하나로 뽑혔다.

비결은 글쓰기 교육이다. 지난 2014년 이 학교는 대구 지역 고교 가운데 처음으로 '온라인 글쓰기 교육방'인 '경상행복미소방'을 만들었다. 다른 학교에선 학생부 기록·관리용으로 사용하는 온라인 프로그램을 경상여고는 학생들이 직접 자기 글을 올리고 점검하는 '온라인 글쓰기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소방 내 한 코너인 '경상인의 독서 열두 달'에는 매회 학생들이 '북콘서트' 때 읽은 책 내용에 대한 생각과 수업 교과목과 관련한 책을 읽고 난 후 든 생각, 동아리·진로와 관련된 책을 읽고 난 후 의견 등을 글로 정리해 올린다. 수업 시간에 궁금한 내용이 생기면 '미소방'에 직접 질문을 올린 후 스스로 책·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답을 글로 적어내는 코너도 있다.

지난달 21일 대구 경상여고 강당에서 이 학교 동아리 ‘북콘서트’ 소속 학생들이 각자 읽은 책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지난해 ‘잘 가르치는 베스트 일반고’ 11곳 중 하나로 뽑혔다.
지난달 21일 대구 경상여고 강당에서 이 학교 동아리 ‘북콘서트’ 소속 학생들이 각자 읽은 책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지난해 ‘잘 가르치는 베스트 일반고’ 11곳 중 하나로 뽑혔다. /김동환 기자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상여고 교사들은 "'쓰기'가 학생들의 학업 역량을 크게 올려준다고 믿는다"고 했다. 문제 풀이식 수업, 교과 지식 위주 수업보다 학생이 책을 읽고 자발적으로 문제 의식을 갖고 탐구하는 과정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진짜 학력을 올리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다. 질문이 생기면 교사에게 묻기보다는 먼저 관련된 책을 읽고, 그 경험을 글쓰기로 표현하는 자기 주도적 과정 속에서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노하우가 쌓인다는 얘기다. 박용태 교장은 "미국 하버드생이 가장 가지고 싶은 능력으로 '글쓰기'를 꼽을 정도"라며 "우리 학교 건학 이념이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교육'인데, 글쓰기를 통해 학생 개개인이 탐구심을 표현하는 총체적인 능력이 길러진다"고 했다.

쓰기와 더불어 경상여고가 강조하는 것이 '읽기'다. 경상여고 도서관 장서는 5만여권으로 학생 1인당 61권꼴이다. 대학도서관진흥법이 규정하고 있는 '전문대 학생 1인당 장서 수 30권'의 두 배가 넘는다. 1993년부터는 재단에서 2~3년에 한 번씩 전교생에게 책 1권을 선물했고, 작년부터는 매년 전교생에게 고전(古典) 1권씩을 선물하고 있다. 아무리 대학 입시에 바빠도 고교 졸업 전 3권의 고전은 접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올해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모든 학생에게 나눠줬다. 학생들은 이렇게 받은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글로 써 미소방에 올려야 한다. 경상여고 관계자는 "'미소방'을 활용하면서 학생들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이 크게 상승했다"고 말했다.

경상여고는 최근 조선일보가 만든 '글쓰기 노트' 520권도 구입했다. 1~2학년 모든 재학생이 1권씩 갖고 글쓰기를 배울 수 있게 됐다. 같은 재단 남학교인 경상고에도 1~2학년용 540권을 주문했다. 경상여고 관계자는 "국어 시간에 글쓰기 노트를 활용해서 학생들의 글쓰기 기초 체력을 키워줄 것"이라며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어려워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준 높은 글을 따라 쓰기 좋은 교재를 발견해 '이거다' 싶었다"고 말했다.


박세미 기자 양지호 기자